[고요한 원장] 한국의 기술보부상 신 서유기(1)

유리벽

2021-12-12     고요한 원장

고요한 원장은 경북에 개원하고 있는 치과의사다. 필명을 사용하고 있는 고요한 원장은 치과의사이자 작가라 할수 있다. 본지는 15회에 걸쳐 고요한 원장이 중국을 오가면서 느꼈던 진료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치과의사로서의 삶과 애환을 통해   잔잔히 그려가는 그의 논조는  공감을 느끼게  할 것이다.(편집자주) 

 

랴오닝성(요녕성, 辽宁省)은 중국의 동북 3성 가운데 랴오동(요동, 辽东) 반도를 포함하는 서남부 일대의 행정구역이다. 베이징을 위시한 중국 본토와 연결하는 관문역할을 하는 요충지이다. 일제가 이곳을 대륙 침략의 교두보로 사용했고, 러일 전쟁이 벌어졌던 역사도 있다.

랴오닝의 주도는 선양(심양, 沈阳)이다. 선양은 우리나라와 역사가 깊다. 우선 선양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펼쳐진 곳이다. 살수(薩水)는 지금까지 평양 인근의 청천강이라 알려져 왔는데, 최근에는 선양의 도심을 가로지르는 훈허渾河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고구려의 평양성이 북한의 평양이 아니라 선양의 남쪽에 위치한 랴오양(辽阳)이 유력한 지금, 나도 개인적으로 이 의견에 한 표를 던진다. 그래서 선양과 관련한 우리의 역사를 살수대첩으로 시작했다.

고려 때는 충선왕이 원나라의 심양왕으로 봉해졌던 역사가 있다. 또한 선양은 청나라의 개국수도로, 호란 이후 소현세자를 비롯해 조선의 왕족과 수많은 양민들이 볼모로 잡혀가 살아야 했던 슬픈 역사가 서린 고장이기도 하다. 이때 끌려간 조선인은 무려 60만 명에 달하고, 지금도 선양시와 그 인근 지역에는 그들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연행(燕行, 조선의 사신이 북경(연경)에 가던 일)의 중요한 기점으로 나온다.

일제 때는 봉천奉天이라 불리며 만주를 배경으로 한 여러 문학작품에도 등장한다. 지금은 대한민국과 북한의 영사관이 나란히 포진하고 있는, 한반도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북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그 선양에서의 일이다.

평소 나를 우호적으로 대하며 환자를 곧잘 몰아주는 상담실장이 있다.
하루는 그녀가 환자 한 사람을 봐달라고 한다. 4개월 전에 다른 선생님에게 수술 받은 분인데,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파노라마 사진을 열어두고, 수술 후부터 지금까지의 경과를 실장으로부터 자세하게 들었다. 그러고 나서 면밀하게 CT를 살펴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6개의 임플란트 모두 정상적인 치유의 길을 걷고 있지 않다. 그 중 2개는 처음 심은 위치에서 변위(變位)가 일어나 있다. 변위는 임플란트의 치유과정에서 가장 안 좋은 신호 가운데 하나다.

다음 날 출근길에는 병원의 오너 수종(소 사장, 苏总)이 샤오인(小尹)을 통해 전화를 걸어왔다. 임플란트를 빼내고 다시 심어야 하는 환자가 있는데, 나보고 봐달라는 같은 내용의 전화다. 그런데 너희 한국의사가 심은 거니까 비용을 받지 않고 해주면 안되겠냐는 거다.

고원장 심은 거도 문제가 생기면 다른 의사가 봐주지 않느냐면서. 그런데 이거 분명 부탁인데, 그의 접근방식이 다분히 불쾌하다.

다른 병원 같으면 재수술인 경우에는 인센티브를 더 지불하고, 접근도 최대한 조심스럽게 해오는 게 일반적인데. ‘싸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염치없이’ 하고 우리나라 속담과 같은 형식의 표현까지 써가며 미안해 하는데 말이다. “한두 개도 아니고 여섯 개를 공짜로 해달라는 건 너무하지 않나요? 원장님.” 하며, 샤오인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계속 들고 있다. 나는 일단 전화를 끊게 했다.  

대기 중인 상담 환자 몇 명을 받고, 나는 바로 자리를 물렸다. 일단 내 마음을 내가 몰랐다. 혼자 심호흡을 해가며 먼저 불편한 심기부터 다독였다. 사장이란 작자는 밉지만, 대개 환자는 죄가 없는 법이다. 그렇다.

내 마음은 환자를 보고 싶은 거다. 동시에 역사와 외교 부문에 자주 등장하는 ‘실리와 명분’이라는 관용구가 떠올랐다. 그래! 일단 명분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실리를 놓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머리 속에 문구가 얼마만큼 정리되고도, 옳은 결론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한참을 뜸을 들여 점심 때가 다 되어서야 나는 샤오인을 통해 답을 주었다. 가능하면 토씨 한 자 안 틀리게 번역해서, 내가 말하고 써준 그대로 수종에게 전달해주길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수종! 환자가 원하면 나는 환자를 볼 겁니다. 당신들이 내게 돈을 주고 안 주고는 상관 없어요. 그분은 내가 수술한 환자의 소개 환자이고, 담당 실장도 내가 봐주기를 부탁하고 있어요. 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의사의 정신이라 배웠습니다. 사람의 도리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런 경우는 먼저 수술한 의사에게 지불한 수술 인센티브를 되돌려 받는 게 일반적입니다. 받게 되면 저한테로 돌려 주심이 마땅하겠지요. 돈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일단 문제부터 해결합시다."

오후에 환자를 만났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화가 많이 나있다. 내게 수술을 받은 여동생이 소개해서 찾아왔는데, 자기는 수술을 다른 의사에게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만든 병원의 처사에 무엇보다 분통을 터뜨렸다. 수술 당일의 불쾌감부터 시작하더니, 지금까지 덜걱거리는 임시틀니를 끼고 고생해 온 일에 대한 하소연, 그리고 병원과 병원사람들에 대한 불신 따위를 마구 쏟아낸다.

컴플레인 환자의 말은 가능하면 끝까지 들어주는 게 원칙이지만,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문제는 해결사로 나선 내게도 유쾌하지 않은 기운들이 계속해서 와 부딪친다는 거다. 자기 임플란트가 왜 이렇게 됐고 누구 잘못인지 끝도 없이 따지고 든다. 심지어 자신을 도와주려 와있는 사람에게 자꾸 화를 낸다. 말하는 투가 마치 임플란트를 내가 심기라도 했고, 나까지 전부 다 한 통속이라 여기는 듯하다. 
‘이건 아니다!’ 나는 일단 자리를 떴다. 그러곤 약관의 병원 관리자인 리웬장(이 원장, 李院长)을 만났다. 

“환자가 나를 고맙게 생각하고 부탁을 해도 들어줄까 말까 한데. 저렇게 흥분한 상태 그대로 내게 밀어 넣으면 도대체 어떡하자는 거냐? 이러고도 내가 봐주길 바라고 결과가 좋길 바라냐? 시작부터 기분이 잡쳐버렸는데, 내가 이런 마음가짐으로 수술을 하면 어떻게 되겠나, 응? 먼저 당신들이 환자를 달래라. 그러고 환자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줄 사람은 고원장밖에 없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라.” 하며 쏘아붙이고는 예약된 다른 수술을 하러 갔다.

그렇게 그들에게 일정한 시간을 주고는 늦은 오후에야 환자를 다시 만났다. 다행히 그는 숨이 많이 죽어 있다. 가능하면 빨리 수술 부위를 열어야 하는 상황이라 한번 더 다짐을 받고는 곧바로 수술실로 모셨다. ‘환자는 6개의 임플란트 중 2개가 좋지 않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는데. 아아!’ 진실을 모른 채 수술실로 들어가는 환자의 뒷모습이 무거운 내 마음을 다시 한번 짓눌렀다.

이런 경우의 일반적인 수술계획은 ‘상태가 안 좋은 임플란트를 빼낸다. 염증조직을 제거하고 주위에 정상적인 조직이 노출될 때까지 깨끗이 소파한다. 적합한 사이즈의 새로운 임플란트를 재식립한다. 필요에 따라 뼈 이식을 진행한다.’ 순이다.

수술 부위를 열고 심어진 임플란트의 상태를 하나씩 살펴갔다. CT에서 읽었던 대로 임플란트마다 주위에 염증이 생겨 있다. 순진한 기대는 여지없이 깨지기 마련인가. 문제가 심각하다. 치조골과의 골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임플란트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가는데, 임플란트가 빠져나가고 남은 치조골은 폭탄이 떨어진 듯 움푹 패어있다. 즉시 재식립은 굳이 하자면 할 수는 있겠지만, 안 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된다.

여섯 개째 마지막 임플란트를 빼내는 순간, 수술실에는 소리 없는 절망의 탄성들이 새어 나온다. 스태프들의 얼굴은 모두 마스크와 수술모자로 가려져 있지만, 눈빛만으로도 표정이 훤히 읽힌다. 사드로 인해 중국 내의 혐한 감정이 높아가던 시기인지라, 같은 한국 선생님이 심은 임플란트를 모조리 다 빼내고 있는 내 심정은 곱절로 참담했다.

평소에 이런 상황을 접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숫자의 임플란트가 문제를 일으키는 사례는 드물다. 보통 이런 경우는 술자의 미숙함이나 기술적인 잘못보다는 감염이 원인일 가능성이 크다. 소독이나 술 전후 투약 관리에 허점이 생긴 거다. 최근 선양 병원이 수술방과 소독실의 인원을 한꺼번에 교체하고, 그 운영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바꾼 사실이 순간 뇌리를 스쳤다. 그것도 나 이외의 한국 의사가 추가로 오기 시작한 어느 날 하루아침에 바뀌어 있었다. 병원의 초기부터 수술 시스템을 세팅하고 스태프 교육을 맡아온 나와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말이다.  

수술 경과를 설명하고 위로의 말을 전하려 회복실로 들어서려는데, 고객불만 처리반 주임과 환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환자의 날선 목소리가 새나온다. “의사의 손길이 이래야지! 그날은 무슨 목수한테 수술 받는지 알았다니까!” 환자는 다시 격앙되어 있다. 다소 과장된 표현 뒤로도 끊임없이 울분을 토해낸다.

감정 조절마저 힘들어 보인다. 얼마 못 가 그는 자포자기한 듯 실의에 빠져 수액을 맞기로 받아들인다. 이때다 싶어 나는 문 안으로 들어섰다. 먼저 병원을 대신해 정중하게 사과부터 드렸다. 환자의 몸과 마음을 다 만져주고 싶었다. 

"많이 힘드시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화를 많이 내지는 마셔요. 화는 돌이킬 수 없는 지나간 일들을 자꾸 떠오르게 하잖습니까. 생각에 갇히면 재삼 힘들어집니다. 무엇보다 화는 상대에게 던지지만 자신부터 먼저 해치잖아요. 회복까지 몇 달 다시 고생하셔야 할 텐데, 만약 재수술을 결심하게 되면 그때는 꼭 저를 찾아주시기 부탁 드립니다. 이유야 어쨌든 정말 유감입니다."

함께 일을 처리해주던 주임은 그날 원내 동선에서 마주칠 때마다 눈가가 젖은 모습이었다. 퇴근할 시간이 되자 그녀가 나를 찾아왔다. 그러더니 대뜸 오늘 자기는 두 번을 울었다고 한다. 한번은 병원 때문에 울고, 내가 다시 한번 자기를 울렸단다. 보상과 관련해 병원 측이 보여준 문제처리방식이 자신조차 받아들이기 힘들 만큼 형편없는 수준이라 환자와 함께 울고, 어떻게 보면 이 문제에 직접 책임이 없는 제삼자이자 이방인인 내가 환자를 대하는 진실한 태도에 감동해서 다시 울었다고 한다. 주임의 말이 감동이다.

그녀는 감성이 풍부한 여린 사람이다. 이런 험한 일을 하려면 사람이 좀 모진 구석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튼 내 진심이 환자에게까지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임에게만은 그렇게 보였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저녁에는 리웬장이 주관하는 회식이 있었다. 원래 계획에 있었던 거겠지만, 하여간 있었다. 회식할 기분도 아닌데. 여느 회식과 다름없이 먹고 마시고 떠들고 웃고, 다들 즐겁다. 나는 음식이 안 넘어가 와인만 홀짝이고 있는데. 개중에서도 리웬장이 제일 즐거워 보인다.

그렇게 시끌벅적하던 방 안이 스피커 전원이 나간 것처럼 한순간 모든 소음이 사라지더니, 내가 그들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함께 있던 공간이 아득해지더니, 갑자기 그들과의 사이에 쇼윈도 유리 벽이 생겨난다. 유리 벽은 다시 동물원의 유리 케이지로 입체화되더니, 나 혼자 공중에 떠서 그들을 조감하고 있다. 일그러진 표정의 환자가 유리 벽에 양 손바닥을 댄 채 씩씩거리며 그들을 들여다 보고 있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별안간 그가 내 진료실로 찾아왔다. 상담실장이나 통역도 대동하지 않고 불쑥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자기 임플란트를 다 뺐다고 소리를 지른다. 당시 자신은 임플란트 2개가 좋지 않은 걸로 알고 왔는데, 왜 6개를 다 빼냈냐는 거다. 그 동안 리웬장을 비롯한 담당자들에게 따졌더니, 자기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고원장에게 가서 물어보랬다는 것이다.

내가 이번 달에 며칟날 와서 며칠간 머무는지도 소상히 알려줬다는 것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게다가 어찌된 일인지, 여동생이 고원장에게 수술 받은 건 알고 왔지만, 자신은 놀라운 신기술을 가진 다른 한국의사가 새로 온다는 광고를 보고 왔고, 처음부터 그를 지목한 것이지 내겐 수술 받을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고 한다. 병원이 다른 한국의사에게 수술 받도록 유도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으악! 정말 놀라운 일이다. 막판 반전이 있는 추리소설을 방불케 한다. 그럼 그동안 내가 환자와 병원을 위한답시고 해온 수고들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것도 땡전 한푼 안 받고. 뭐를 위해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한 헛된 짓이란 말인가?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환자는 임플란트 재식립은 포기하고 결국 틀니를 하기로 결정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한 차원 더 높은 윤택한 삶을 살겠다고 선택한 임플란트 치료였을 텐데. 누군가에 의해 그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그의 입을 통해 그간의 의료 분쟁이 원만하게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그가 심적인 2차 피해를 당한 것 같았다. 그의 영혼마저 깊은 상처를 받은 건 아닌지 하는 마음에 내가 다 미안해졌다. 관리자와 담당자들이 각자의 편의와 손익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정부분이나마 기여한 나를 공범으로 둔갑시켜 놓은, 웃지 못할 사연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그는 내게 한바탕 쏟아내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갔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 말도 못했다. 그저 듣고만 있었다. 너무 충격적이기도 했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통역도 없이 혼자로는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았으리라. 그날 답하지 못한 답은 머리 속에 새겨 넣고, 말하지 못한 말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행간에 박아두었다.

직접 만나든 통역이나 상담실장을 통해서든 전해주고 싶어서. 하지만 이도 이미 여러 해 전 이야기다. 말도 글도 전하지 못한 채로 나만이 간직하고 있으니 그는 지금도 이 진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날 나를 포함한 병원 관계자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6개의 임플란트 전부를 빼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날의 실질적 관심사는 ‘그 자리에서 과연 몇 개를 재식립 할 수 있냐?’였습니다. 하지만 환자분에게는 술 전에 미리 그렇게 자세하게 말씀 드리지 못했습니다. 병원 측이 그렇게 접근해 달라고 내게 부탁했습니다. 그보다는 빼내야 하는 게 명확한 2개만으로도 가슴 아플 당신에게 시작도 하기 전부터 고통을 가중시키고 싶지 않다는 나의 나약한 마음이 더 크게 작용했습니다. 그때 임플란트 6개를 빼냄과 동시에 몇 개는 바로 심을 수도 있었습니다.

병원 측에서는 그래 주길 바랐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환자분을 위해서였습니다. 병원 측은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내게 크게 실망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래도 나는 떳떳했습니다. 새로 심은 그 한두 개의 임플란트가 당신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계속해서 병원에 끌려가야 하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자유로워지길 바랐습니다. 너무나도 유감입니다."  

그 후로도 선양에서는 비상식적인 처사들이 지속적으로 터져 나왔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환자와 상담실장이 임플란트 2개를 심기로 잠정한 상황에서, 내가 평생 쓸 수 있는 장기적인 치료방안으로 임플란트 개수를 3개로 늘리자고 제안해 병원의 매출에 기여한 사례인데, 수종이 상황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고원장이 수술을 잘못해서 보철비용이 늘어났다’며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나를 비난했다든가.

수술 인센티브를 나와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삭감 통보하면서, 사장은 빠지고 회계직원만 앞세운다든가. 또 다른 컴플레인 환자를 대화나 보상이 아니라 공안 인맥을 통해 힘으로 제압해버렸다든가. 서로 직접적인 소통도 없이 그렇게 수종과 나 사이에는 볏짚처럼 실망감만 차곡차곡 쌓여갔다. 

나는 선양과의 이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샤오인! 그만 둘 수 있을 때 그만 두자. 더 오면 추해질 것 같다. 그만 두고 싶어도 그만 두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우리는 그만 둘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그렇게 몇 달을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결국 우리는 선양을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환자는 더더욱 진실을 알 길이 없어져버린 셈이다. 
그 후로도 1년여에 걸쳐 선양에서는 내게 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처음엔 샤오인을 통해 연락이 왔기에 나도 샤오인을 통해 일정이 바빠 가기 어렵다고 답했다. 그러자 다음엔 수종이 중국어도 짧은 내게로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랬을까 하고도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아닌 건 아니다. 나는 고려해 보겠다 말하고는 며칠을 공들여 작성한 문자를 보내며 정중히 사양했다.

때로는 내가 합작하고 있는 다른 병원의 나와 친한 몇몇 관리자들을 통해서도 연락해왔다. 그때마다 나는 난색을 표했다. 그들도 중간에서 불편해하는 눈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번 아니면 아닌 거다. 게다가 나를 찾는 이유도 주로 선양 병원의 외국인 전문가 일정에 구멍이 생겼을 때인 것 같았다. 말하자면 내가 땜빵용인 셈이다.

나는 수종의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부탁하기보다는 ‘내가 올 때마다 선양에 수술이 많지 않느냐?’, ‘고원장이 선양 한번 오면 돈 많이 벌어가지 않느냐?’ 하는 식이었으니 말이다.

나와는 가치관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렇게 자꾸 조르니까 한편으론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끝까지 버텼다. ‘언 발에 오줌 누기’보다는 그게 장기적으로 서로를 위하는 길이라 판단했으니까. 몇 년이 지나 내가 한국으로 영구 귀국해버렸으니, 6개 심어 6개 빼낸 환자 이야기의 내막은 이제 나만 아는 유리 벽 속의 비밀로 남았다. 

(다음 호에는 불시착이 이어집니다. ) 

고요한 원장(필명)은 치과의사로서 글을 쓰는 작가로 지난 10년간 중국 31개 도시를

고요한 원장

전전하며 임플란트 수술을 전문으로 해온 대한민국 기술보부상.

싸드로 인해 얼어붙은 한중 관계로 중국 내 한국인에 대한 시각이 따가운 가운데서도, 내가 만나는 중국인들에게 ‘내가 아는 한국인은 좋은 사람이다.’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민간 외교관이라 말한다.

저서로는 하늘로 간 아내에게 못다한 이야기를 담은 부치지 못한 편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