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원장] 신서유기(4)
베이징
샤오인이 선양 병원에 왕주런(王主任, 왕 주임)이라는 사람이 새로 부임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주런은 나를 안다고 한다. 예전에 베이징에서 내 진료에 참여했다고. ‘누구지? 베이징만 해도 내가 진료에 관여한 병원이 네댓 개는 되는데. 대체 어느 병원 누구를 말하는 거지? 왕 씨는 기억이 없는데.’ 출장 첫날 출근해서 막 진료 채비를 하고 있는데 누가 나를 찾아왔다. 들어오며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가만 보니 낯이 익다. 동남향의 창으로 테두리 한 그녀의 흉상 둘레로 햇살이 눈부시게 부서진다. 4년 전 베이징이다.
H 한중 합작 의료기업(이하 H라 하겠다)에서 페이닥터로 일하다 그만두던 즈음의 이야기다. H는 한국의사들을 내세워 그들의 병원사업을 중국 전역으로 확장하는 데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당시에는 베이징을 비롯한 산둥성(山东省, 산동성)의 칭다오(청도, 靑島)와 장쑤성(江苏省, 강소성)의 난징(남경, 南京) 3개의 거점도시에 미용성형 병원을 운영 중이었다. 이후로 H는 중국 의료계 내에서는 나름 대기업으로 성장해, 몇 해 전에는 상하이 증시에 상장까지 했다고 한다. 성형외과 피부과 치과 마취과의 한국의사들은 원칙적으로 한 병원에 고정되어 있지만, 경우에 따라 순회 진료를 하기도 했다. 다른 지역에서 한국의사를 찾는 환자가 있으면 그때그때 출장을 나갔다는 얘기다.
H에 한국 치과의사는 나밖에 없었다. 따라서 나는 3개 병원을 모두 커버해야 했다. 몸은 고달팠지만 다음 도시에 나를 기다리는 환자와 스태프 들이 있다는 사실은 신명 나는 일이다. 일하는 동안만은 나름 보람되게 다녔다. 베이징 병원에도 내가 진료를 보던 환자들이 있었다. 마침 그들 중 하나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고,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를 다시 찾았다.
불행히도 나는 막 H를 떠난 몸이었다. 그때는 한국으로 돌아올까도 고민했지만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곧바로 통역 겸 비서 한 사람을 채용해 프리랜서로 일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존의 도시 베이징과 난징의 다른 치과병원들, 그리고 산시성(陕西省, 섬서성)의 시안(西安, 서안), 쓰촨성(四川省, 사천성)의 청두(成都, 성도), 산둥성(山东省, 산동성)의 지난(济南, 제남) 등지의 새로운 도시 새로운 치과 몇 군데와도 새롭게 합작관계를 열어가느라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환자는 돌아오는 월요일 아침 항공편으로 몇 년간의 유학 길에 오른다. 나는 일요일까지 풀 타임으로 산동 지난의 갓 합작을 시작한 치과에서 진료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지난은 베이징과는 고속철로 두 시간 가량 걸리는 거리에 있다. 내가 봐오던 환자라 마무리를 해주긴 해야겠는데, 딱 봐도 서로 시간이 안 맞았다.
베이징의 담당 상담실장을 통해 약속을 조율했다. 처음에는 나와 환자 각자의 입장에 근거해 서로 유리한 시간만이 오갔을 테다. 실장은 중간에서 양쪽의 줄다리기에 끌려 다니며 시간을 맞춰내지 못한다. 다급해진 베이징의 관리자 천종(진 사장, 陈总)이 나섰다. 그도 어설프기는 매한가지다. 게다가 그는 부탁은커녕 날짜와 시간을 못박으며 ‘언제 언제 와서 봐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다그치고 나온다. 이미 회사를 떠난 나를 마치 부하직원 부리듯 대한다.
어이가 없다 못해 나는 ‘얘가 돌았나?’ 싶었다. 다닐 때라고 한국원장이 그의 수하일 수는 없고, 그렇게 접근해서는 안 되는 관계인데. 명색이 우리가 대한민국 의사인데 말이다. 생각할수록 화가 쌓여간다.
예전 H의 칭다오 병원에서도 천종은 소통에 큰 허점을 드러낸 바 있다. 자신의 리더십 부족과 무능함으로 인해 많은 한국의사들을 불행에 빠뜨린 전력을 지닌 자다. 이번에도 그는 리더로서의 기본적인 역량조차 발휘하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이 일에서 빠지는 게 나아 보인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얼마나 답답했으면 환자 보호자가 직접 샤오인에게로 연락을 취해오기도 했다. 그런데 병원을 이미 나온 몸으로 내가 병원사람들을 통하지 않고 환자와 다이렉트로 접촉한다는 건 사실 좀 조심스럽다.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상도덕에 어긋나는 일이기도 하고. 그러는 가운데 환자와 나 사이에서 베이징 병원이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할 거라는 조짐은 차츰 커져만 갔다. 죄 없는 샤오인이 환자와 베이징 양쪽에서 나를 향해 날아오는 총알들을 받아내며 불쾌함을 토로하는 횟수가 잦아지고 있었으니.
급기야 H의 한국부문 전체를 관장하는 한국인 관리자 K가 나섰다. 그런데 K가 그들에게 무슨 얘기를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지만 다짜고짜,
“고원장님이 중국에서 계속 일하실 거면, 굳이 중국인들과 원수 질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중국 의료계는 좁은데.”
하며 겁박을 한다. 이 환자 안 봐주면 재미없다, 그들이 나를 가만 두지 않을 거라는 투다. 중국인보다 더 매서운 말투다. 베이징 실장과 천종의 도발이 진주만 습격이면 이건 그야말로 히로시마 급이다. 그냥 한 방에 끝내준다. 이젠 아예 환자를 봐주기가 싫어진다.
그 당시 필리핀을 비롯한 동남아 국가에서는 우리 교민들을 대상으로 살인을 포함한 강력 범죄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안타깝게도 범죄의 배후에는 어김없이 한국인이 있었다. 대다수의 교민들이 서로를 상대로 수익을 내야 하는 취약한 교민사회 구조가 우리 동포를 아군이 아니라 적군으로 간주하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입맛이 씁쓸해진다.
중국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타국 살이 하는 교민들끼리 협력자로서 시너지를 내야 할 마당에 오히려 서로를 경쟁상대로 본다는 것이다. 그것도 중국인들이 뻔히 보는 앞에서 서로를 헐뜯으며. 중국으로 이주해온 이방인들 사이가 적당히 나쁘길 바라는 중국인들로선 콧노래가 절로 나올 지경이다.
사실 그 시점의 나와 H는 관계가 껄끄럽긴 했다. ‘중국에 와서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이 한국인이고, 그 다음이 조선족이다.’라는 웃지 못할 우스갯소리가 있다. 나도 예전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고, 상하이에서 병원을 하며 직접 경험까지 해본 사실이지만, H는 그 불편한 진실을 다시 한번 여실히 보여주었다. 하도 부끄러운 이야기라 지면에 쓸지를 놓고 수도 없이 망설였지만, 문맥 상 웬만큼은 말해야 한다.
H에서도 내가 치를 떨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동료 한국의사였고, 그 다음이 조선족 통역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끼리 나눈 사담이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병원사람들이 모조리 알고 있는 생방송이 되어 있었다. 무슨 모의라도 나눈 후라면 우리를 바라보는 그들의 매서운 눈초리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뿐만 아니라 상하이와 베이징에 있는 의료계 관계자들까지도 우리 내부소식을 어떻게 알고 번개같이 연락을 취해왔다.
우리는 당연히 배석했던 조선족 통역을 의심했다. 그들을 내보내고 우리끼리 대화해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섬뜩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우린 우리 방에 도청장치라도 있나 의아했다. 급기야 병원 밖에서 한국의사들만의 모임도 가져봤다.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정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그래도 우리 중에 밀고자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셈이다.
통역 조장과 한국인 관리자 K를 다그치자 마침내 동료였던 한국인 성형외과의사가 나팔수임이 드러났다. 자주독립을 꿈꾸던 우리의 비밀결사 모임은 귀신과 머리를 맞댄 채 나눈 것이었다.
이렇듯 한국인들끼리 돕고 힘을 합치기는커녕 틈만 나면 상대를 물어뜯었다. 서로 밟고 올라서려는 매우 추한 모습을 여과 없이 중국인들 앞에서 고스란히 보여 준 것이다. 행여 한국원장들이 뭉쳐서 세를 불리기라도 할까 항상 노심초사하던 중국인 관리자들은 도리어 우리가 자충수를 둬주고 있으니, 그 얼마나 고마웠겠는가.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이완용이란 인물이 임시정부 내에 핵심역할을 하고 있으니, 우리의 독립이 물 건너간 건 이제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나는 H를 떠났다. 내 발로 걸어 나오긴 했지만, 여전히 H 사람들과는 앙금이 뿌옇게 남아있었다.
한편 K는 내가 한국에서 빚더미에 올라앉아 살길이 막막할 때 나를 도와준 사람이다. H와의 계약을 성사시켜 중국에서의 새로운 기회를 열어 준 장본인이다. 내가 아내와 아이들과 한집에 살 수 있도록 은신처 겸 쉼터를 만들어준 은인이란 말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명실공히 중국 전문가라는 그가 소통을 잘 못한다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K도 나와 환자, 그리고 베이징 병원 측에 대한 정보가 완전치 않은 거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베이징 측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되자, 어설픈 정보 한두 개만 흘려주고는 K에게 바통을 떠넘긴 거다. 따라서 모두다가 바라는 원만한 목표에 다다르는 일은 그를 통한다 하더라도 수일 째 온갖 분란만 키워온 여태까지의 흐름보다 하나도 나을 바 없어 보인다.
이건 나와 내 통역, 한국인 관리자 K, 베이징 관리자 천종, 베이징 담당 실장, 환자와 환자보호자 들간의 총체적 문제다. 이들이 각자의 위신과 손익을 앞세워 실시간 교통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사이사이의 교차로 신호들이 연동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현상 말이다. 누군가가 점멸신호를 깜빡이거나 적색등을 켜고 있다. 물론 한 군데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중간에 있는 교차로들을 통과해서는 목표지점에 다다를 수 없다는 얘기다.
지난에서의 시간은 자꾸 지나가고 있다. 보다 못한 나는 샤오인을 통해 환자 보호자에게 직접 연락을 취했다. 연락이 닿자 즉각 이야기가 통했다. 두어 차례 통화 만에 내가 그들에게 가는 걸로 가닥을 잡았다. 지난에서 일요일까지 일정을 소화하고 밤에 베이징에서 만나기로. 환자 가족이 나보고 날짜와 시간만 정해주면 지난으로 오겠다고도 했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좀 더 수고하면 될 터였다. 아무리 아쉬운 사람이 그들이라지만, 환자는 잘못이 없지 않은가.
나흘 간의 숨가쁜 지난의 일정을 마치고 샤오인은 난징으로 돌아갔다. 파김치가 된 나는 베이징 행 고속열차에 몸을 실었다. 두 시간을 달려 베이징난짠(북경남역, 北京南站)에 도착하니, 통역과 기사가 나와 있다. 미니 밴 안에서 미리 준비토록 한 KFC 햄버거로 저녁을 때우며 다시 한 시간을 달렸다.
병원에 다다르니 밤 11시가 넘어가고 있다. 조명이 다 꺼진 병원 대기실에는 환자와 부모 그리고 간호사 한 명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 동안 나와 옥신각신했던 관리자들은커녕 담당실장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인사만 간단하게 나누고 곧바로 진료에 들어갔다. 한국에서 공수한 기공물과 치과용 레진 합착제도 준비되어 있다. 문제가 없는지 며칠 전부터 직간접으로 계속 점검해왔지만 다시 한번 확인한다. 간호사와 통역 그리고 치과의사. 대충 이만하면 있을 건 다 있는 셈이다. 한번 해보자. 주어진 조건 하에서 어떻게든 단번에 끝맺어야 한다. 다음은 없다. 아! 이번에도 마법이 통해야 할 텐데. 막연히 특수 작전에 투입된 영화 속 폭발물 전담반이 연상되었다.
환자를 일으켜 입을 헹구도록 하는 사이에 벽시계 바늘은 새벽 1시를 지나고 있다. 휴! 끝났다. 심리적 압박감이 상당했지만 잘 마무리되었다. 환자와 보호자도 매우 만족스러워 한다. 대한민국 파이팅!
얼른 가서 쉬라고 하니, 환자와 가족은 공항으로 바로 갈 거란다. 집이 공항 반대편이기도 하고, 진료가 언제 끝날지 몰라 미리 준비를 다 해가지고 나왔다고. 그럼 시간이 좀 있다. 차를 내오게 하고, 그들과 잠시 둘러앉았다.
환자의 엄마가 대화를 주도해나간다. 그녀는 자신을 대만인이라고 소개한다. 피부색과 얼굴형이 한눈에 봐도 남방계 사람이다. 딸아이의 살짝 펑퍼짐하면서 비대칭인 코는 엄마 꺼를 복제해 심어놓았다. 엄마는 처음부터 중국 내에서 진료 받을 수 있는 한국 치과의사를 원했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나를 찾았다.
H의 콜 센터에 연락을 취하자 베이징 병원으로 예약을 잡아줬던 거란다. 아빠는 한마디씩만 짧게 짧게 중국어로 말하고 있지만, 몇 가지 정황 상 한국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엄마가 바이두(百度)에서 H와 까오웬장(고 원장, 高院长)을 찾았고, 아빠가 네이버를 통해 고요한을 검증했으리라’는 시나리오를 구성해 볼 수 있겠다.
그녀는 자신들이 베이징에 산 지는 수십 년이 되고, 정부 관련 일을 헤온 실력자들이란다.
이 정도 병원 문 닫게 하는 데는 힘도 안 든다며 거들먹거린다. 까오웬장이 끝내 자기네 딸을 봐주지 않았다면 병원에 환불요청 및 배상소송은 물론이고, 위생국에 고발해 아예 문을 닫게 할 작정이었다고 한다. 그간 병원 측은 줄곧 내가 비자 문제로 한국에 가있고, 시간 맞춰 중국에 들어오지 못할 수 있다고 둘러댔단다.
그들 가족은 병원은 신뢰할 수 없지만, 까오웬장 당신은 와줄 줄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고 한다. 늦은 밤에 고생스럽게 와준 것만으로도 고맙고, 자신의 고명딸이 예쁜 미소를 가지고 미국 유학 길에 오를 수 있게 해주어 더더욱 감사하다고.
나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당연한 거라고, 따님 이를 예쁘게 만들어 준 거는 한국의 기공소이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이 주역이라고, 결과가 좋아 다행이라고, 다들 밤늦도록 수고하셨다고, 유학 잘 다녀오라고, 그렇게 답하고는 자리를 정리했다.
‘멀쩡히 잘 살아있는 내 비자를 핑계 삼았구나. 게다가 최근에 난 한국 근처에도 간 적이 없는데. 병원이 그런 식으로 둘러댔구나. 하기야 용병의 거취에 관해 내국인의 불만을 무마시키기에는 그 방법이 가장 무난했을 테지. 그런데 H 사람들은 왜 내가 안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 동안 내가 그것밖에 안 되는 인간으로 비쳐졌나?
환자와 나를 양 끝에 두고 중간중간 교차로에선 과연 무슨 일들이 벌어졌던 걸까? 아무래도 불꽃이 가장 많이 튄 지점은 환자와 베이징 병원 사이 아닐까? 여하튼 내가 백의종군하는 마음으로 이 시간에 이렇게 와서 진료해 주건만, 회사와 병원의 링다오(영도, 领导)란 작자들은 끝내 코빼기도 보이질 않네. 바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실망스러운 마음은 금하기 힘들군. 끝내 알 수 없는 게 사람 속이요 중국이란 말이던가?’
나는 그들을 좇아 문밖까지 따라 나왔다. 대형 캐리어와 이민가방 4개를 끌고 공항을 향해 새벽 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베이징 여름 밤의 매캐한 공기 속으로 깊은 한숨 한 줄기를 불어 넣었다.
당시 베이징에서 늦게까지 진료를 도왔던 치과 간호사가 왕주런이다. 어떻게 지냈느냐, 계속 베이징에 있었느냐는 내 질문에 그녀는 베이징에 있긴 있었지만 H에서는 진즉에 나왔다고 한다. 그러고는 내내 베이징 무슨 무슨 치과병원에서 일했다고. 원래 고향이 선양 이쪽인데, 식구 중에 누가 아픈 사람이 생겨 가까이에서 지내려고 돌아왔다고. 그러고 보니 그때도 얼핏 고향이 동북 어디라고 들었던 거 같다.
그러한 고난의 이력들이 쌓이고 쌓여 그녀는 주런 자리에까지 올랐으리라. 참고로 중국의 주런(主任, 주임)은 우리나라로 치면 과장급에 해당하니, 병원이나 공직에서는 상당히 높은 관리자 직급이다. 왕주런은 말을 이어간다. 한국인은 책임감이 강하다고. 일 처리가 깔끔하다고.
천종을 비롯한 그들의 생각과 행동은 지금도 미스터리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그들이 나와 대척되는 생각을 가졌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중국 내에서 이 같은 글을 쓰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없지 않은가. 글을 써놓은 지 몇 년이 지난 지금 불현듯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베이징 에피소드가 종결된 직후에 있었던 뒷담화다. H 소속의 한국 성형외과의사들끼리 나눈 대화인데, 내가 전해 들은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내용 대부분은 휘발되어 날라가고 없지만 뇌리에 깊숙이 박힌 문장은 세 개다.
먼저 내 편에 선 A의 말이다.
“그럼 그렇지! 고원장님이 그러실 분이 아니신데.”
A는 나를 도와 모래알 같은 한국원장들을 결집해 협의체를 구성하고자 했다. H 내에서 그리고 H를 넘어 중국 어디에서도 협상력 있는 교섭단체로까지 끌어올려보려 했다. 사실 한국의사들은 이름이 원장이지 한낱 고급소모품에 불과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셈이 밝은 몇몇 중국인들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하기야 공부와 진료만 해온 순진한 한국의사와 장사치로 잔뼈가 굵은 중국인 관리자는 애초에 대적이 안 되는 게임이었다. 서커스단 단장과 공중곡예사의 매치였다고 볼 수 있겠다.
곡예사들끼리 호흡을 맞추고 힘을 합쳐도 위험천만한, 그것도 낯설고 물 선 해외공연에서, 각자가 따로따로 곡예를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B의 비유는 한술 더 뜬다. “자기는 늘 무슨 동물원 원숭이 취급 당하는 기분이었다”고.
나와 A, B는 힘을 다 합치고도 역부족이었고, 그 여파로 미용성형병원 내에서는 주변인일 수밖에 없는 치과의사 하나만 튕겨져 나왔다. A는 주모자 격인 내가 병원을 나오자 못내 아쉬워했고, 지금도 그때의 분통을 토로한다.
끝으로 연일 나를 내쫓지 못해 안달 나있던 나팔수 C가 한 말이다.
“결국 보실 걸 왜 그렇게 애먹이셨대?”
C 역시 내가 떠나고 얼마 못 가 H를 나왔다는 씁쓸한 후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우리의 목줄을 다발 채 틀어쥐고 가면 중국인들이 도로 자기에게 맡겨줄 줄 알았는데, 맡기기는커녕 목줄 하나가 부족하다는, 네 거까지 같이 다발 속에 집어넣어오라는, 허탈한 답을 듣지나 않았을까.
다음 호에는 용병전쟁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