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그린] 인간본성의 법칙(23)

인간의 내면을 해독하는 단하나의 열쇠

2022-03-27     로버트그린

감정이 진화를 거듭해 온 이유는 인지능력이 진화해 온 것과는 사뭇 이유가 다르다.그렇기 때문에 두가지 모두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한 형식이기는 해도, 뇌안에서 두가지가 서로 매끄럽게 연결되지는 않는다. 동물의 경우는 몸으로 느낀감각을 추상적 언어로 변환해야할 필요성이 없기 때문에 감정이 원래 의도된대로 무리없이 제기능을 한다.

하지만 인간은 감정과 인지능력이 서로 분리돼 있기때문에 내부에서 끊임없는 마찰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고, 결국에는 자신의 의지를 벗어난 ‘두번째 감정적자아’까지만들어진다.

동물은 잠시 공포를 느껴도 이내 그감정이 사라진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느낀 공포를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그 공포를 점점 더 심화시키면서 위험이 사라진 한참후까지도 계속해서 공포를 느끼고 있다. 그러다 급기야는 상시적 불안을 느끼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지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인간이 이토록 진보했으니 그 과정에서 어떻게든 이 감정적 자아를  잘길들이지 않았겠냐고 믿고 싶은 사람도 많을것이다.
어쨌거나 우리가 선조들만큼 폭력적이거나 육욕에 휘둘리거나 미신을 믿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이다 .진보나 기술이 우리의 본성을바꿔놓지는 않았다. 기술과 진보는 그저 감정의 형태와 그에 따른 비이성적 행동의 유형을 바꿔놨을 뿐이다.

한 예로 정치가를 비롯한 일부 사람들은 이미 수백,수천년전부터 우리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았고,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은 그런 장난질을 오히려 더 교묘하고 세련되게 만들어줬다.

광고회사들은 사람들의 잠재의식에 아주 효과적으로 작용하도록 설계된 메시지를융단폭격처럼 퍼붓는다. 우리는 늘 소셜미디어에 접속돼 있고 그래서 바이러스처럼퍼져 나가는 새로운 형태의 정서적영향에 취약하다. 이들 매체는  차분한 반성이 가능하게끔 설계된 것들이 아니다.

이것들이 늘 우리 곁을 지키고 있는 한, 우리는 한발 물러서서 생각할 수 있는 정신 적 여유가 점점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우리는 민회에 참석한 아테네인들처럼 수많은 감정과 불필요한 연극놀음에 꼼짝없이 포위당해 있고, 그 이유는 인간 본성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이성적’, ‘비이성적’이라는 단어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사람들은 내게 동의하지않는사람에게는 죄다 ‘비이성적’ 이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그러니 최대한정확하게 이둘을구분할 수 있도록 간단한 정의를 내리고 시작하자. 우리가 지침으로 삼을 기준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끊임없이 감정을 느끼고 그감정은 계속해서 인간의 생각을 물들인다. 감정은내 기분이 좋아지거나 내자존심을 세울수 있는쪽으로 생각의 방향을 틀게 만든다.

생각을 할 때 내느낌이나 기분이 전혀 개입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성적인 사람은 이점을 잘알고 있다. 이성적인 사람은 자기 성찰및노력을 통해 어느 정도는 감정을 뺀 사고를 하고 그 영향을 일부 상쇄할 수 있다.

비이성적인 사람은 그런 자각이없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파급효과나 결과에 대한 면밀한 고려없이 행동으로 돌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