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국원장] 서평(13)

개인주의자 선언

2022-04-01     김병국 원장

 

책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09월 23일 출간
페이지 280 ISBN13    9788954637756 / ISBN10    8954637752


판사가 스스로 개인주의자라고 하다니 뻔뻔스럽다고 여길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구에서 발전시킨 민주주의 법질서를 공부하고, 이를 적용하는 일을 오랫동안 해온 법관에게 개인주의는 전혀 어색한 말이 아니다.

개인주의는 유아적인 이기주의나 사회를 거부하는 고립주의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사회에는 공정한 룰이 필요하고, 그로 인해 개인의 자유가 일정 부분 제약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개인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위해 다른 입장을 가진 타인들과 타협하고 연대해야 한다고 믿는다.

집단 내 무한경쟁과 서열싸움 속에서 개인의 행복은 존중되지 않는 불행한 사회에서 벗어나는 방법인 ‘이민’만은 아닐 것이라고 믿으며, 감히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의 사회를 꿈꾼다. - 책의 앞날개 저자소개 중에서

학력고사 세대로 1988년 인문계 전국수석을 하며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한 저자는 사법시험 합격(사법연수원 26기) 후 법관으로 재직하다 2020년 2월에 23년간 입었던 법복을 벗었다. 재직 중에 ≪판사유감≫, ≪개인주의자 선언≫, ≪미스 함무라비≫, ≪쾌락독서≫를 연달아 출간하며 ‘글 쓰는 판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2021년 tVN을 통해 방영되었던 <악마판사> 역시 그의 작품이다. 가장 최근작으로는 에세이 ≪최소한의 선의≫가 있다.

인간은 무릇 모의고사 또는 학력평가에서 일반고 전교 1등, 특목고 전교 1등, 광역자치단체(특별시 또는 광역시) 1등 정도의 성취만 이룩하더라도 ‘내가 최고야’라는 오만함의 노예가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공부 잘하는 이들은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재수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라는 편견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러 작품들을 통해 필자가 파악한 저자는 이런 선입견으로부터 한 발짝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퇴직 후에도 대한변호사협회에 변호사 자격등록조차 하지 않았다. 퇴직 직전에 모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던 “변호사로 개업할 생각은 없으며 글 쓰고 여행하며 지낼 것”이라던 계획을 몸소 실천 중인 것이다. 본문 중에서 “기력 있을 때 주변 정리하고 마지막 날까지 지구의 오지들을 걷는 여행을 떠나 길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계속으로 떠나는 코끼리처럼. 이 얘기를 비장하게 했더니 마눌님이 가려면 혼자 가라고 그러시더라.”고 서술한 부분에서는 보헤미안 같은 그의 엉뚱한 매력이 샴페인처럼 터진다.

다른 작품들에 앞서 ≪개인주의자 선언≫을 가장 먼저 추천하는 이유는 이 책이 자아, 행복, 마왕 신해철의 죽음, 교육제도, 취업난 등 우리의 현실과 밀접한 주제들에 대해 냉철한 분석과 더불어 따뜻한 대안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책 전체를 흐르는 해박한 지식, 탁월한 균형감각, 약자에 대한 배려는 종착역인 서울역을 향하는 기차 안에서 철교를 지나며 처음 마주했던 한강만큼이나 커다란 울림을 준다.

스티븐 핑커, 대니얼 카너먼, 조너선 하이트, 조지 레이코프, 캐스 선스타인 등 저자가 책 안에서 직접 언급한 이들의 저서들을 찾아 읽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또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행위는 tVN의 또 다른 유명 프로그램 <수요미식회>에서 추천하는 맛집을 직접 방문할 때만큼의, 혹은 그 이상의 행복을 독자들에게 선물해줄 것이다.

총 3부(部,part), 46개의 장(章,chapter) 중 ‘행복도 과학이다’, ‘아무리 사실이라 믿어도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좌우자판기를 철거해야 하는 이유’는 이 책의 백미(白眉)라 생각한다.
휴가가 되면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문유석의 작품들을 쌓아놓고 원 없이 읽는 것이다. 클린턴 대통령이 휴가 중 가장 하고 싶은 일로 "파울로 코엘료의 책을 쌓아놓고 원 없이 읽는 것"을 꼽았던 것처럼.

우리가 서로에게 ‘말’이라는 무시무시한 흉기를 무신경하게 휘둘러대는 대신 조금만 더 자제하고 조금만 더 친절할 수만 있다면, 세상은 훨씬 더 평화로운 곳이 될 것이다. - 본문 중에서

김병국 원장
포항죽파치과
슬기로운 개원생활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