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그린] 인간의 내면을 해독하는 단 하나의 열쇠 (37)
악몽 같은 인간들과 마주쳤을 때 그렇게 하기란 쉽지 않다. 극도로 자기도취적인 사람, 수동적 공격성을 드러내는 사람, 기타 감정을 자극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늘 우리의 이성을 시험에 들게 한다.
러시아의 작가 안톤 체호프를 한번 보라. 어쩌면 그는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 중 가장 지독하게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이성적 인간의 전형이라 할 만했다. 그는 식솔이 많은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로 자녀들을 무자비하게 때렸고 어린 체호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의사가 된 체호프는 부업으로 글을 썼다. 그는 의사로서 받은 교육을 활용해 인간이라는 동물을 연구했다. 인간을 그토록 비이성적이고 불행하고 위험하게 만드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고 싶었다.
체호프는 소설과 희곡을 통해 캐릭터 속으로 들어가보는 게 엄청난 치유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게 해보면 최악의 유형에 속하는 인간들조차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이런 식으로 그는 모든 사람을, 심지어 그의 아버지까지도 용서할 수 있었다.
체호프가 사용한 방법은 아무리 뒤틀린 사람이라 해도 그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상상해보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도 나름의 논리가 있을 것이다. 그들도 자기 딴에는 만족을 추구하는 것인데 그 방식이 비이성적일 뿐이다.
체호프는 한 걸음 물러나 그들의 내면에 있을 법한 스토리를 상상해봄으로써 그 잔혹하고 공격적인 인간들의 가면을 한 겹 벗겨냈다. 그렇게 해체해놓고 보면 그들 역시 보잘것 없는 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들은 미워할 대상이 아니라 동정의 대상이었다. 우리도 사람을 대할 때는 좀 더 작가처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상대가 아무리 악질이라 해도 말이다.
사고와 감정 사이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라
감정을 사고로부터 떼어놓을 수는 없다. 두 가지는 철저하게 서로 얽혀 있다. 하지만 거기에도 어쩔 수 없이 더 우위에 있는 요소가 있고, 분명히 남들보다 감정의 지배를 더 많이 받는 사람이 따로 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적절한 배분과 균형이다. 그래야 가장 효과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것을 이렇게 비유했다. ‘기수(騎手)와 말(馬).’
여기서 말은 감정이라는 인간의 본성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장본인이다. 이 말은 어마어마한 에너지와 힘을 갖고 있지만, 기수가 없으면 갈피를 잡지 못한다. 아직 길들여지지 않았고, 포식자들의 위협을 받고 있으며, 끊임없이 말썽거리를 찾아다닌다.
한편 여기서 기수는 ‘생각하는 자아’다. 기수는 훈련과 연습을 통해 고삐를 쥐고 말을 인도한다. 이 짐승이 지닌 강력한 에너지를 생산적인 무언가로 바꿔놓는다. 둘은 나머지 하나가 없으면 쓸모가 없다. 기수가 없으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도, 목적을 가질 수도 없다. 말이 없으면 에너지도 힘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더 우위에 있는 것은 말이다. 기수는 힘이 약하다. 반면에 고삐를 지나치게 단단히 죄는 너무 강한 기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