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일상 속 오아시스 (40)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2022-10-31     김병국 원장

 

“제가 MB의 아바타입니까?”
“제가 갑철수입니까, 안철수입니까?”

 언어학과 정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프레임’의 실례(實例)와 파괴력을 보여줄 만한 엄청난 사건이 2017년 4월 23일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다. 대선 후보 3차 TV토론회 중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스스로 ‘MB 아바타’, ‘갑철수’를 수차례 반복해서 입에 올렸다.

당시 대선후보 지지율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갤럽의 조사를 기준으로 안 후보의 지지율이 최고 37%에 육박하며 문 후보의 지지율을 거의 추월하는 거대한 ‘안풍(安風)’이 불던 시점이었다. 이에 다급해진 민주당과 문 후보 대선캠프는 안 후보에게 ‘MB 아바타’, ‘갑철수1) ’라는 프레임을 씌워 네거티브 공세를 펼쳤다. 이 도발에 안철수 후보가 반응하며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TV토론회에서 해당 프레임을 스스로 언급하기에 이른 것이다.
 

안 후보가 상대방의 프레임 또는 언어를 직접 수차례 반복해서 언급하는 사건으로 인해 ‘MB 아바타’, ‘갑철수’라는 단어 또는 프레임을 모르던 국민들 또는 유권자들마저도 그것들의 존재를 인지하게 되었다. 필자 본인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그 여파는 실로 엄청났다. 네 번의 토론회 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안 후보 지지율은 20%로 반 토막이 났다. 안 후보의 이러한 과오를 두고 한 정치 평론가는 정치 초보들이나 하는 ‘언어적 자살’ 또는 ‘대권 포기 선언’이라고 힐난하였다. 국민의당 역시 대선 후 평가 보고서에서 “안 후보가 TV토론에서 대통령감이라는 각인을 하는 데 실패했다”며 TV토론을 패인으로 꼽았다.
 
워터게이트 사건2)으로 하야한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미국 전 대통령이 살아있었다면 안 후보의 실수를 두고 본인의 일처럼 뼈아파 했을 것이다. 그 역시 사임(resign) 압박을 받고 있던 와중에 TV에 출연하여 국민들 앞에서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I'm not a crook!)”라고 외쳤다. 그 순간 미국인들은 그를 사기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얼마 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후일 이 사건을 두고 조지 레이코프는 닉슨이 '사기꾼(crook)'이라 는 비판자들의 말을 언급하면서 스스로 사기꾼이라는 프레임을 걸어 버린 자승자박(自繩自縛) 사례라고 평론했다. 반대 세력들의 언어인 ‘사기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닉슨 측이 새로 만든 용어를 사용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도 있다. ‘진실’, ‘정직’ 등의 용어를 사용해서 스스로를 변호했더라면 TV 연설의 충격파와 워터게이트 사건의 결말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권토중래(捲土重來)와 인지언어학
 저자인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는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언어학과에서 언어학의 황제 또는 교황으로 일컬어지는 놈 촘스키(Noam Chomsky)3)  교수 아래서 수학(受學)했다.

조지 레이코프는 변형생성문법을 앞세워 1970~1980년대에 해지 로스(Haj Ross), 폴 포스털(Paul Postal), 제임스 매콜리(James McCawley)4) 와 함께 촘스키 통사론의 해석의미론에 반기를 들었다. 촘스키 언어학의 종말을 목표로 한 이 학문 전쟁에서 조지 레이코프는 결과적으로 패퇴했다. 이후 레이코프는 변형생성문법을 손에서 완전히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인간의 인지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언어와 언어사용의 본질을 해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인지언어학(cognitive linguistics)을 창시한다. 사유의 폭을 넓히는 동시에 학문의 영역을 옮긴 것이다. 저자는 국제인지언어학회가 창립된 1989년에 초대 회장을 역임한 이후 격년마다 개최되는 학회 행사에 주요 초청 연자로 여전히 왕성히 활동 중이다.

같은 길 다른 길
레이코프는 언어학자인 동시에 정치평론가로 활동 중인 스승 촘스키와 유사한 행보를 걷는다. 다만 촘스키가 자신의 언어학 이론과 전혀 무관한 정치 평론을 하는 반면, 레이코프는 자신이 정립한 인지언어학 이론을 정치 현상 분석과 제언에 적극 활용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촘스키가 소아치과 수련을 마친 후 임플란트 진료에 주력하는 치의라면, 레이코프는 교정과 수련을 마친 후 교정치과를 개원하여 교정치과 한 분야에만 매진하는 치의라 할 수 있다.

미 진보진영의 해독제
 2004년, 미국 진보 진영은 패배의식에 젖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왜냐하면 같은 해 치른 선거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재선을 허용함과 동시에 공화당에게 상하 양원 다수석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 출간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는 소위 멘붕(‘정신의 붕괴, 멘탈리티의 붕괴’를 의미하는 신조어-필자 주)에 빠진 진보 진영에게 패배의 원인과 당면 과제의 해결책을 동시에 선물해주었다. 이후 치러진 2008년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와 민주당은 승리했다.

한국에서의 인기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한국어판은 2006년 출간과 동시에 故 노무현 전 대통령, 당시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 등 유명 정치인들의 큰 사랑을 받으며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여야 국회의원들은 앞 다투어 이 책을 읽고 독서토론회, 세미나 등을 개최하였다. 그 결과 이 책은 국회 구내서점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랜 시간 머물렀다. 이 소식이 신문을 통해 보도되면서 입소문을 타서 일반인들도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정치 분야 베스트셀러로 등극시키기에 이르렀다.

김진혁 교수의 추천사 중 마지막 문장을 전하며 일독(一讀)을 권한다.

 자신의 ‘뇌’가 타인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이 되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권한다.
- 김진혁,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전 EBS PD이자 ‘지식채널 e’ 기획자)

1) 안철수와 부인 김미경이 보좌관에게 장보기 같은 자질구레한 집안 허드렛일까지 시키며 부려먹였다는 보도가 나오자 보좌관들한테 갑질 한다는 뜻으로 ‘갑질 하는 철수’가 대두되었고 이를 부르기 편하도록 세 글자로 줄여 ‘갑철수’라는 말이 탄생했다.

2) 1972부터 1974년 사이 미국에서 일어난 역대 가장 유명한 정치 스캔들이다. 워터게이트(Watergate)라는 이름 때문에 물과 관련된 비리나 사건으로 오인되는 경우도 있으나 워터게이트는 사건이 벌어진 빌딩의 이름이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의 재선을 위해 공작단이 은밀하게 워터게이트 빌딩에 위치한 민주당전국위원회 본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되면서 벌어진 사건이다.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스스로 사임한(물론 탄핵 직전까지 갔었음) 미국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굴욕적인 사건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계기로 비리 사건에는 '게이트(gate)'라는 표현이 일종의 접미사로 통용되게 되었다. 이 용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분야를 막론하고 비리, 은폐, 조작 등이 행해진 경우에 사용되고 있다. 폭스바겐의 디젤 게이트, 인텔의 CPU 게이트, 애플의 배터리 게이트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3) 1957년 ≪Syntactic Structure(통사 구조)≫라는 저서를 통해 “변형생성문법”을 창시하며 언어학계에 이른바 “촘스키 혁명”을 일으켰다. 참고로 ‘통사론(統辭論,syntax)’이란 단어가 결합하여 형성되는 구(句) ·절(節) ·문장의 구조나 기능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로 구문론 또는 문장론이라고도 한다. 

4) 이 4명의 학자들은 묵시록의 4기사에 빗대어 자신들을 “언어학의 4대 기수(Four Horsemen of the Apocalypse in linguistics)”라 칭했다.

글_김병국 
포항 죽파치과원장
슬기로운 개원생활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