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도취의 법칙(62)

자기애를 타인에 대한 공감으로 바꾼다

2023-01-29     로버트그린

 

사람은 끊임없이 서로의 모습을 바꾸어 놓고 있는데도 말이다. 남녀관계는 그 자체로 수명이 있는 하나의 인격과 같다. 그래서 양쪽의 자기도취적 성향을 더 악화시키거나 심지어 그런 면을 끄집어내는 매우 자기도취적인 '관계'도 있다.

일반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자기도취적이 되는 이유는 공감의 부족 때문이다. 공감이 없으면 두 사람은 자기 입장에 빠져 방어적으로 점점 더 뒷걸음질 친다. 톨스토이 부부의 경우 이런 현상은 톨스토이의 일기를 읽음과 동시에 시작됐다.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가치관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소냐가 보기에 그런 행위는 청혼을 후회하는 남자의 행동이었다. 반면 인습을 타파하는 예술가였던 톨스토이의 입장에서는 소냐의 반응이야말로 새로운 결혼 생활에 대한 그의 열망을 이해해보려고 하지 않는 그의 영혼을 보지 못하는 행동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오해했고 그렇게 굳어진 입장은 이후 48년간 지속됐다.

톨스토이의 영적 위기는 이런 자기도취적 관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두 사람이 서로 상대의 눈에 그 행동이 어떻게 보일 지 생각해 보았다면 톨스토이는 분명 소냐의 반응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녀는 평생 동안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해왔고 그 덕분에 그렇게 자주 임신을 하고 많은 아이를 양육하면서도 큰 무리가 없었다.

소냐는 한 번도 영적인 생활에 깊이 빠져본 적이 없었고, 둘 사이의 관계는 늘 훨씬 더 육체적인 것이었다. 그 런데도 어떻게 톨스토이는 소냐가 하루아침에 달라지기를 기대했을까? 톨스토이의 요구는 거의 가학적 행동에 가까웠다. 톨스토이는 소냐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소냐의 입장과 필요를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해줄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오히려 톨스토이의 진정한 영성(性)이 드러났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냐도 톨스토이의 위선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진정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한 남자를 봐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유아기부터 단 한번도 충분히 사랑받는다고 느끼지 못했고, 아주 실제적인 개인의 위기를 겪고 있는 한 남자 말이다. 소냐는 톨스토이를 그대로 따를 수는 없다고 부드럽게 거절하면서도 그의 새로운 삶을 응원하고 그를 사랑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공감을 사용하면 쌍방이 자기도취에 빠지는 것과 정반대의 효과를 낸다. 한쪽에서 이렇게 나오면 상대의 마음까지 녹여서 그의 공감도 끌어낼 수 있다.

상대가 내 입장을 이해하고 표현해주면서 내 영혼 속으로 들어오는 데 나만 계속해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기는 힘들다. 그때는 분명히 내 쪽에서도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게 된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더라도 사람들에게는 저항을 그만두고 싶은 갈망이 있다. 계속해서 수세적인 태도를 취하며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도 아주 지치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