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주의 미술(5)
에곤 쉴레 (Egon Schiele 1890~1918),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 1906~1980)
이 두 사람은 독일 출신이 아닌 오스트리아 화가들로 빈의 도시적 성격과 퇴폐주의를 옹호하 는 분위기에 반하여 표현주의 활 동에 가담한 작가들이다.
클림트의 제자였던 에곤 쉴레는 점차 아르누보의 화려한 장식성과는 또 다른 자신의 내면의 갈등을 표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자신의 정신적 고독과 욕망, 1차 세계대전 직전의 불안과 혼란, 강박적인 성에 대한 집착 등을 뒤섞어 표현하였던 그는 수많은 유화, 수채화, 드로잉을 쏟아냈다.
매우 빠르게 그려진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완전히 적나라한 노출로 욕망과 성과 그로 인한 고통 받는 인간상을 표현하였다. 모두 말라 비틀어진 모습에 노골적으로 성을 드러내며 인간의 내적 욕망과 본성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쉴레는 괴기스러운 모습의 자신의 누드로 유명하였는데, 이를 통해 예민하고 상처받는 허무한 인간의 고통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정확하고 날카로운 선묘에서 찾을 수 있는데, 선이 색채보다 특징적으로 우세한 요소로 중요시되었다. 쉴레는 1918년 빈 분리파 전시회에 참여했지만 몇 달 뒤 스페인 독감으로 숨진 임신 6개월이었던 아내를 따라 3일 후 불과 2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한편 코코슈카는 '화단의 테러', '미친 코코슈가'로 불리며 1908년 데뷔부터 폭력적인 성, 비극적인 사랑, 인간의 삶과 죽음 등을 주제로 작품을 남겼다. 그는 미술뿐 아니라 연극에서도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였다. 초기 날카로운 선과 침울한 분위기의 작품을 선보였던 코코슈카는 이후 다리파 화가들과 교류하게 되면서 강렬한 색채와 질감을 가미한 그림을 그린다.
이후 완곡하고 자연을 노래하기도 하나 초기 시기의 충격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분위기는 사라진다.
코코슈카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클림트, 실례와 함께 빈 분리파를 이끌었던 사람으로 94세의 긴 생애동안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클림트가 지도하는 '빈 아틀리에'에서 수학하면서 클림트의 우아한 화풍에 큰 영향을 받은 코코슈카는 인간의 삶과 죽음, 폭력적인 성, 비극적인 사랑 등을 주제로 작품을 남겼다.
코코슈카의 대표작 중 하나인 「바람의 신부」는 오스카 코코슈카의 대표작으로 빈 사교계의 여왕이었던 현대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 알마 말러와의 격정적인 사랑을 거친 붓 터치와 차갑고 어두운 색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사랑하는 자와 사랑 받는 자, 여인은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는 듯 편안한 잠에 빠져 있다. 반면 남자는 바람의 신부인 자신의 여자가 언제 바람처럼 사라져 버릴지 모르기 때문에 걱정과 번민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코코슈카는 사랑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 편집증 증세까지 보였고 결국 알마 말리는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잊지 못했던 그의 광적인 사랑에 대한 일화는 오히려 이 작품을 더욱 유명 하게 만들었다.
비록 독일의 분리파 운동이 먼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높은 ‘빈 분리파’의 미술사적 인지도는 아르누보의 화려한 장식성과 세기 말의 상징주의로 꽃 피운 독특한 표현주의를 선보인 클림트라는 거장과 그의 제자 에곤 쉴레와 오스카 코코슈카가 있었기 때문이다.
E. L. 키르히너 (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만화가로 독일 중세의 목판화와 동양의 풍속화,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원주민의 원시미술과 몽크의 영향을 받았다.
본래 건축을 공부하였던 키르히너는 드레스덴서 서 1905년 동료 건축학도인 헤겔과 함께 ‘다리파(Die Bracke: 브뤼케’를 창설하고 정열적인 표현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키르히너의 표현주의적 양식은 매우 개성적이며 심리적 긴장과 에로티시즘으로 유명하였으며, 그가 추구한 미술세계는 내면세계의 갈등을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시각적인 매체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1898년 키르히너는 독일의 후기 고덕기의 미술가들, 특히 그에게 일생 동안 영향을 미친 뒤러의 판화에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그는 유겐트틸 운동과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의 동적인 화풍에 영향을 받아 단순한 형태와 밝은 색을 사용하게 되었다. 1904년 아프리카와 폴리네시아의 미술을 접하게 되면서 이러한 발전은 더욱 촉진되었다.
특히 판화에 두드러진 관심을 보였던 그는 독일 중세의 목판화나 동양의 풍속화에서 받은 영향으로 강한 선과 넓은 평면이 표현된 그의 화면은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표현주의적 인상을 전하고 있다. 그의 표현주의적 회화의 특징은 뭉크로부터 본질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원주민의 원시미술에서 단순하고 강렬한 조형과 상징적인 표현력을 받아들이고 있다.
'다리파' 그룹은 1911년 베를린으로 옮겼으나, 그 뒤 잡지 『폭풍우(Der Sturm)』및 《청기사(Der blaux Reiter)》 운동에 참가하면서 표현주의 운동을 지속해 나간다. 그의 대표작인 「베를린의 거리 풍경(1913)」 과 「드레스덴 거리(1908)」 등이 독특한 그의 표현주의적 양식을 보여 주는 전형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고흐와 뭉크의 감성적 화풍의 영향을 받고 있으나, 들쭉날쭉한 윤곽선과 긴장된 얼굴표정의 인물 표현은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드레스덴 거리」는 당시 급속히 발전하고 있던 물질문명에 반발하여 자연과 인간에로의 회귀를 주장하던 키르히너의 가치관이 잘 표현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줄지어서 한 곳을 향하고 있는 사람들, 희망이나 기쁨은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의 사람들, 강렬한 원색과 강한 붓의 터치로 드레스덴 거리의 무겁고 갑갑한 공기를 느끼게 하고 있다. 또한 「베를린의 거리」는 베를린의 건달사회에 대한 그의 냉소적인 시각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독특한 표현주의 양식을 보여 준다.
[ 출처 - 현대미술의 이해 | 홍창호 著 | 양서원 출판사 | 2013.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