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미술

Dadaism & Surrealism

2024-09-05     홍창호 교수
샘 1917년(1964년 복제) 36/48/61 파리퐁파두 국립현대미술관 ,마르셀뒤샹

 

다다이즘은 1915~1922년경 스위스, 독일, 프랑스 등의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났던 '반문명', '반합리적인 '반예술'운동을 일컫는다. 다다의 근본정신은 1차 세계대전을 야기했던 서구문명에 대한 분노를 담은 부정정신과 파괴정신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기성의 모든 전통적인 가치관과 사회적, 도덕적 속박에서 정신을 해방, 개인의 진정한 근원적 욕구에 충실하고자 한 것이다. 다다는 특정 예술의 운동이기보다 모든 기성의 가치에 대한 파괴와 부정을 의도하는 부정정신에 그 의의가 있으며, 예술의 형식 역시 파괴적 성격을 띤 전위적인 것이었다.

'다다(dada)'란 용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 우연히 만들어진 것으로 합리적인 서구문명이 만들어 낸 전쟁에 대한 회의적 의식을 바탕에 두고 시작되었다. 최초 다다운동은 1차 세계대전 중 스위스 취리히에 모여든 망명 중이던 시인이나 미술가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이들은 카페 '볼테르'에서 시낭송회나 전위예술 등의 활동을  통해 기존 가치체계 대한 회의적 의식을 분출하였다. 이들의 시대의식은 이성을 배제하고 무정부 상태, 자연적인 정서, 직관, 그리고 비합리성을 강조하고, 그 예술적 표현수단으로써 잡음, 동시성, 우연성 등을 이용하였다. 이 개념들은 자유 형태의 릴리프와 우연적 효과로 표현된 콜라주 등의 제작을 통해 당시의 다다 작가들의 실험 속에서 구체화되었는데, 이후 진행된 오늘날까지의 현대예술의 중요한 테마로서 지속되고 있다.

비록 다다는 구체적인 운동으로 단명하였으나, 기성의 모든 도덕적, 사회적 속박으로부터 정신을 해방시키는 예술정신을 고취하는 전위의식을 추동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다의 진정한 의미는 끊임없이 기성가치를 회의하고 도전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끊임없이 지향하고 창조하는 근원적 원동력을 제공하였다는 점이다.

다다이즘의 전개

기존의 가치체계에 대하여 과감히 도전했던 다다는 1차 세계대전 중과 그 직후에 전 세계로 급속히 확대되어 갔는데, 처음에는 취리히, 뉴욕 등의 중립도시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베를린, 파리에서 확대되었다. 루마니아의 시인 차라, 독일의 작가 발, 스위스의 화가 아르프 등이 그 선도자들이었다.

취리히 다다 (1916~1919)

1차 세계대전 중 전쟁의 상처로 인해 매우 염세적이면서 부정적인 시각에서 비롯된 다다는 처음 중립국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되었다. 전쟁을 피해 스위스 취리히에 모여든 예술가들은 전쟁에 대한 회의로 절규하며, 기존의 가치관과 전통예술 개념에  대한 부정으로, 전위적 예술행위를 펼쳐나간다. '소음'과 '동시성', 그리고 '우연성'의 세 가지 특징을 중심으로 한 다다 작가들의 예술운동은 취리히를 시작으로 1차 세계 대전 중 또는 전후에 세계로 급속히 확대되었다.

루마니아의 시인 차라, 독일의 작가 휴고 발, 스위스의 화가 장 아르프 등이 선도자가 되었는데, 이들 작품의 공통적인 경향은 기계같이 잘 짜맞추어진 이성에 반대하고 우연성을 강조하는 예술을 추구하였다. 다다 작가들은 우연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해프닝을 즐겨 상연하였는데, 사전 의도 없이 즉흥적으로 시행됨으로써 기존에 술의 권위와 일상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고 있다.

또한 그들은 소위 레디메이드의 오브제 또는 움직이는 오브제, 콜라주 또는 앗상블라주로 통하는 메르츠 빌트 등을 시도하게 된다. 대표적인 취리히 작가인 조각가 장 아르프는 우연성을 극대화를 위해 찢어진 종이로 자유 형태의 콜라주의 우연한 배열을 바닥에 놓은 캔버스 위에 그대로 붙여 조형화한 작업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다다 작가들의 기이한 방법들은 다다의 강렬한 가치 부정적 관념과 함께 추상미술, 초현실주의 또는 2차 세계대전 후 1950~1960년대 예술 등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뉴욕 다다 (1915~1920)

취리히 다다와 함께 마르셀 뒤샹을 중심으로 한 뉴욕 다다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다다운동으로 손꼽힌다. 뉴욕에서의 다다이즘은 취리히와 그 모습을 같이하고 있었으며 1차 세계대전 중 또는 대전 전부터 전위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뉴욕의 알 프레드 스티글리츠의 291화랑에서 시작된 뉴욕 다다는 마르셀 뒤샹, 피가비아 및 맨레이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특히 마르셀 뒤샹이 주도하였던 '반미학' 사상과 예술의 '가치전도'를 뉴욕 다다의 중요한 특징으로 살펴볼 수 있다.

전쟁전인 1913년 뉴욕 아모리쇼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라는 미래파적인 전위적 작품을 선보였던 뒤샹은 1915년 뉴욕 이주 후 1917년 기성품(既成品)을 뜻하는 '레디메이드(ready made)' '샘(fountain)」을 발표하며 전통적 예술에 대한 전복을 시도 하여, 다다이즘의 상징적 존재로 자리매김하였다.

보통의 상식을 뒤집는 이러한 전시품들로 시도된 뒤샹의 새로운 미술 개념은 기존의 사고에 대한 과격한 도전이었고, 20세기 서구미술에 큰 영향을 주어 주로 팝아트 계열 작가나 개념미술에 도입되었다. 맨 레이 역시 그의 '레이오그래프' 사진작품에서 일종의 형태적 추상을 발전시키고 있다.

베를린 다다 (1918~1923) 및 파리 다다 (1919~1922)

독일에 있어서의 다다이즘은 베를린 하노버쾰른 등 세 곳의 중심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베를린 다다는 사회비판적 성격의 활동을 보였던 R. 하우스만, G. 그로스 등이 주된 예술가였는데, 이들의 표현특징은 정치적 견해의 표명에 주된 수단으로 포토몽타주 기법의 활용이 주목된다. 취리히와는 달리 베를린은 정치적 중심지이기 도 하였으므로 다다이즘도 혁명적 요소를 갖추고 하우스만의 앙상블뢰즈나 포토몽타주 등을 통해 정치선전의 활동과의 연계성을 살펴볼 수 있다.

쾰른 다다에서 활동했던 에른스트의 기법(技法)은 콜라주가 특징적이었는데, 이는 뒤따라 초현실주의 미술 에서 그가 선보인 프로타주 기법의 선례가 된다. 이를 통해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의 직접적인 연계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외에 잡지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한 파리 다다는 프랑스 문예운동에 기반을 두고 발전하여 후에 초현실주의로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1919년에 이루어졌던 파리에 있어서의 다다이즘 운동은 대표적인 선봉자이자 후에 초현실주의 이론가로 활약했던 A. 브르통이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