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킴김기천대표]자전적회고록
나의 도전은 지금도 계속된다(8)
[덴탈뉴스=김기천대표 ] 한편으로 고맙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목사님의 만용에 약간은 당황스럽기도 했다. 대학병원에서 감염 치료가 안 된 사람을 입원실도 없는 동네 개인병원 의사에게 치료를 맡기겠다는 발상은 누가 생각해도 비합리적일 것이다. 그래도 일단은 환자를 눕히고 붕대를 풀고 거즈를 벗겼다. 하얀 뱃살 가운데 기다란 제왕절개 수술자국이 있었고, 수술자국 중간에 길이 약 2cm 폭 1cm의 깊은 구멍이 뚫려 벌건 살과 누런 고름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베타딘을 적신 거즈로 농을 제거한 후 면봉을 천천히 구멍 속으로 넣어 보았다. 25mm가 넘게 들어갔다. 복막까지 남은 두께를 확인하기 위하여 초음파를 보았다. 복막까지는 30mm가 채 되지 않았다. 불과 4~5mm만 더 뚫리면 이것이야말로 대형사고였다. 내 머릿속 컴퓨터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당시 환자도 별로 없을 때였는데, 이 환자를 완치시키면 틀림없이 소문이 날 것이다. 대학병원에서도 못 고친 것을 개인병원에서 내가 고친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잘못하여 남은 4~5mm가 뚫려 버리면 그야말로 큰일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사실은 부담이 적다. 어차피 대학병원에서 안 되는 것을 맡은 것이니 최악의 경우에도 할 말은 있는 것이다. 환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한번 해 보자고 제안을 했다.
역시 환자는 못 미더운 눈치다. 20평밖에 되지 않는 공간에 허름한 인테리어, 깡마른 의사 한 사람, 간호조무사 한 사람 있는 가정의학과 의원에 자기 생명을 맡기는 것이 당연히 불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나의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신감은 있었다. 누가 뭐래도 나는 나의 감(感)을 믿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때 우리 병원에 온 환자들은 나의 그 자신 있는 태도를 믿고 찾아 주었을 것이다. 환자가 불안한 얼굴로 일어서려고 하는데, 옆에 있던 목사님이 말로써 강하게 푸시를 했다.
마치 자기가 책임질 것처럼 호기롭게, ‘일단 선생님께 한번 맡겨 봅시다.’ 일어나려던 환자가 반쯤 포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안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때 큰 병원에 가셔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며 밑밥을 깔아 놓았다.그리고 당장 며칠 동안은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하루 두 번 드레싱을 하러 내원해야 된다고 하였다.
# 항균에는 실바딘과 은용액
무슨 약을 쓸 것인가 고민했다. 당시 나는 항생제에 대하여 공부를 좀 깊게 한 편이라 그에 대한 지식은 웬만한 감염내과 선생에 못지않다 자부하고 있었다. 먹는 약과 주사로 매일 항생제 투여를 하고 상처의 고름을 깨끗이 닦아 내고 거즈에 실바딘이라는 하얀 크림을 적셔 밀어 넣었다. 이미 대학병원에서 웬만한 항생제는 다 썼을 것이고 그래도 안 들었다면 틀림없어 녹농균 감염이 원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바딘 크림의 설명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유효균종에 틀림없이 녹농균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병원에서는 상처 소독에 거의 무조건 베타딘을 사용했다.
수련받을 때 선배에게 물었더니 베타딘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항균효과를 갖는다고 알려 주어 나도 의심하지 않고 거의 모든 창상에 당연히 베타딘을 사용했다. 그 환자의 창상도 물론 베타딘으로 소독된 상태였었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방법을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에 실바딘을 선택한 것이다. 실제로 당시 의사들 사이에서는 실바딘은 항균효과가 아주 약한 외용제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는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대학에서 시도해 보지 않았을 다른 방법! 나는 실바딘에 승부를 걸었다.
그리고 매일 아침저녁 구멍의 깊이를 쟀다. 조금이라도 구멍이 깊어진다면 대학병원으로 보낼 준비를 하고. 치료 후 3일 정도가 지나니 깊이가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일단 줄어들기 시작하니 상당히 바른 속도로 새살이 차올랐다. 그렇게 20일 동안 치료를 했고 새살이 피부까지 다 올라왔다.
상흔의 크기도 처음 구멍 크기보다는 훨씬 줄었다. 완벽한 성공이었다. 그때 나는 실바딘에 대한 관념이 완전히 바뀌었다. 절대 무시해서 안 되는 외용제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특히 광범위 화상환자에게 왜 실바딘을 사용하는지 이유를 그때 절실히 느꼈다. 그 실바딘에는 silver, 즉 은이 포함되어 있고 그 은이 항균작용을 하는 것이었다.
#은용액과 구강세정기
그 은성분이 녹아 있는 은용액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은용액을 또 집에서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은용액을 구했다. 은용액을 만드는 기계도 구입하고 구강세정기도 구입했다. 은용액을 구강세정기에 넣어 치아 사이와 혓바닥까지 구석구석을 닦아 냈다. 정말 효과가 있었으며 이제야 살 것 같았다. 물론 최선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하여 나는 매 식사 전후 은용액으로 구강세정을 철저히 하고, 매 식전 속효성 인슐린 주사를 맞고, 매 식사 때마나 노르믹스와 소화제를 복용했다.
매일 밤 자기 전 성장호르몬을 1단위 정도 맞고, 수면제를 먹고, 거기다 소화가 잘 안되고 설사도 나고 체중이 빠지니 하루 한두 번은 이유식을 타 먹으며 생활해야하는 보통 사람으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불편한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해서 살 수만 있다면 못할게 없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떠 오르는 중국시장에 법인 설립
그 와중에 제품에 대한 반응은 좋아 사업은 번창해 나갔다. 당시 중국은 떠오르는 시장으로 웬만큼 사업을 한다하는 사람은 중국에 한 다리씩은 걸쳐놓고 있던 시대였다. 그들 중 상당수는 중국에서 돈을 벌어 중국에 젊은 현지처까지 있을 정도였다. 은근히 부럽기도 했다. 비록 은용액과 수많은 약으로 겨우 버티고 있었지만, 나도 중국에 도전을 하기로 했다. 당시 한국 회사는 안정되어 문금자 전무에게 회사 운영을 맡기고, KOTRA에서 운영하는 상하이 사무실을 1년간 임대하여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중국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1년 동안 중국을 탐색한 결과 나의 건강문제도 있고 하여, 중국에서 제일 살기 좋은 산동성 웨이하이에 터를 잡았다. 웨이하이는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면 45분이면 도착할 정도로 거리도 아주 가까웠다.
#산다는 건 버티는 것
2014년 5월, 웨이하이에 10만 불을 투자해 중국법인을 설립하였다. 아파트와 사무실을 임대했다. 아파트와 사무실 사이는 자전거로 약 30분 거리인데, 워낙 체력이 약하다보니 아파트에서 사무실로 출퇴근을 하는 것조차도 버거웠다. 1년 후 아파트 임대료도 아낄 겸 사무실 한쪽을 숙소로 개조하여 숙식을 해결하며 지냈는데, 남의 건물을 임대했으니 함부로 고칠 수도 없고 여러 가지로 불편하였다. 몸도 불편하고, 중국어도 능통하지 못했다. 북경에서 온 조선족 직원이 있었지만 휴일에 그가 북경으로 돌아가면 혼자 어디 돌아 다닐수도 없어 숙소에서 쉬다가 겨우 자전거타고 주변을 한바퀴 도는 것이 일상의 전부였다.
그러다가도 아주 사소한 음식하나 잘못 먹으면 어지럽고(brain fog) 기력이 없어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제품에 대한 반응은 좋아 회사는 잘나가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언젠가 주말에 고통 속에 잠시 정신이 들었다. 그 때 심정은 산다는 것은 버티는 것이었다. 죽을 때까지 버티는 것이었다.
#빼놓을 수 없는 은용액
중국은 넓고 사람은 많다.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 제품을 알리려 중국의 각 도시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수시로 참석했다. 사무실에만 있을 때는 그나마 나은데, 출장을 갈 때면 정말 번거로웠다. 은용액 제조기부터 구강세정기, 각종 약과 인슐린과 성장호르몬, 거기다 이유식까지 챙겨가야 했다. 그러니 우리 회사 중국 직원은 내가 이동할 때 호텔의 호화로움과는 상관없이 호텔방에 냉장고가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인슐린과 성장호르몬은 냉장보관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은용액이 들어 있는 1리터 병 여러 개를 가방에 넣어 짐으로 부쳤다가 검색대에서 발견되어 비행기를 못 탈 뻔했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 은용액은 몇 가지 부작용이 있었다. 일단 치아를 검게 만드는 부작용으로 보기가 싫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 한 가지 은용액을 장기적으로 먹으면 피부가 보라색으로 변한다. TV방송에 유명했던 파파스머프의 보라색 얼굴이 은중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렇게라도 살아야 했고 사업도 해야 했다. 오로지 컨디션을 조금만 좋게 할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뭐든 시도해야 했다.
그렇게 힘들게 개척한 중국지사는 이후 인력 충원도 하고 담당자가 바뀌기도 하고 또 한국에서 보낸 직원이 배신해 심천으로 가서 제품을 복제해 판매하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기적적으로 잘 운영이 되고 있다. 마치 나의 건강이 우여곡절 끝에 회복되었듯이.
# 어려움 속에서도 꽃을 피우다
어려서부터 자연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반장도 해 보고 싶었지만 체력도 약하고 당시에도 치맛바람이 있었는데 엄마 찬스를 쓸 형편도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분단장을 했던 것이 유일한 감투다. 고등학교 때는 건강이 더 좋지 않아 학교를 제대로 다닌 것만도 다행일 정도였다.
1979년 항공대학을 입학했을때는 박정희 대통령치하로 봄만 되면 대학은 반정부투쟁으로 홍역을 치렀다. 주로 서울대와 연고대가 앞장섰는데 그 외의 대학이라고 조용했던 것은 아니다. 1975년이었던가. 박 대통령의 유신철폐를 외치며 서울대 김상진 학생이 군중 연설 중 할복자살을 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은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나에게는 그러한 상황들이 잘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그래도 박 대통령 덕에 혼란이 진정되고 생활수준이 나아진 면이 있는데 할복까지 하며 저항해야 하는 이유가 선뜻 와 닿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 이후 많은 학생회장들이 대중 연설 중 할복을 시도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던 때였는데, 항공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눈부시게 푸른 봄날 강당에 학생들을 모아 놓고 당시 학생회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는 연설 끝에 할복을 시도했는데 할복이 되지는 않았고 복부 피부에 자상을 내는 정도의 해프닝이 되어 버렸는데, 분위기상 데모를 안 하기도 그렇고, 하기도 그런 어정쩡한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해 10월 26일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전두환이 정권을 잡는 일련의 일정 속에서 ‘뭔가 이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광화문과 서울역을 누비며 데모를 하고 도망도 다녔다. 그러나 그때도 절실한 이념으로 무장되어 앞장서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렇게 평범한 대학생활 끝에 졸업을 했고, 공군장교로 군복무를 했다. 전역후 서른 살에 인제의대에 들어갔는데 참으로 암담했다. 젊은 나이에 또 6년을 공부만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니 끝이 보이지도 않는 긴 터널의 입구에 선 느낌이었다. 그래도 어쩌랴. 내가 선택한 길이니 열심히 공부를 해야 했다.
돈이 없으니 공부라도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타야 했다. 그런데 본과에 올라가니 해야 할 공부가 너무 많아 아르바이트도 안하고 공부에만 전념하는 후배들을 따라갈 수도 없어 성적 장학금도 받을 수 없었다. 나이 들어 두 번째 대학을 다니는 것도 죄송한데 넉넉지 않은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김기천 (주)닥터킴 대표
· 가정의학과 전문의
· 인제대학교 백병원에서 수련
·한국항공대학교 기계공학 학사
· 제19대 대통령 선거 예비후보
· 제20대 대통령 선거 예비후보
· 김기천 TV 운영중
· 300만 불 수출의 탑 수상(2023)
· 대한적십자사 최고 명예장 (2021) 저서- 나의 사업 나의 건강 그리고 대통령 출마(2021) 1판 2판 2025년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