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킴 김기천대표의 자전적회고록]

나의 도전은 지금은 계속된다 (9)

2025-07-24     김기천 대표

[덴탈뉴스=김기천 대표 ] 그러다가도 아주 사소한 음식하나 잘못 먹으면 어지럽고(brain fog) 기력이 없어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제품에 대한 반응은 좋아 회사는 잘나가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언젠가 주말에 고통 속에 잠시 정신이 들었다. 그 때 심정은 산다는 것은 버티는 것이었다. 죽을 때까지 버티는 것이었다. 

#빼놓을 수 없는 은용액 

중국은 넓고 사람은 많다.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 제품을 알리려 중국의 각 도시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수시로 참석했다. 사무실에만 있을 때는 그나마 나은데, 출장을 갈 때면 정말 번거로웠다. 은용액 제조기부터 구강세정기, 각종 약과 인슐린과 성장호르몬, 거기다 이유식까지 챙겨가야 했다. 그러니 우리 회사 중국 직원은 내가 이동할 때 호텔의 호화로움과는 상관없이 호텔방에 냉장고가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인슐린과 성장호르몬은 냉장보관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은용액이 들어 있는 1리터 병 여러 개를 가방에 넣어 짐으로 부쳤다가 검색대에서 발견되어 비행기를 못 탈 뻔했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 은용액은 몇 가지 부작용이 있었다. 일단 치아를 검게 만드는 부작용으로 보기가 싫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 한 가지 은용액을 장기적으로 먹으면 피부가 보라색으로 변한다. TV방송에 유명했던 파파스머프의 보라색 얼굴이 은중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렇게라도 살아야 했고 사업도 해야 했다. 오로지 컨디션을 조금만 좋게 할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뭐든 시도해야 했다. 

그렇게 힘들게 개척한 중국지사는 이후 인력 충원도 하고 담당자가 바뀌기도 하고  또 한국에서 보낸 직원이 배신해 심천으로 가서 제품을 복제해 판매하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기적적으로 잘 운영이 되고 있다.  마치 나의 건강이 우여곡절 끝에 회복되었듯이. 

# 어려움 속에서도 꽃을 피우다 

어려서부터 자연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반장도 해 보고 싶었지만 체력도 약하고 당시에도 치맛바람이 있었는데 엄마 찬스를 쓸 형편도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분단장을 했던 것이 유일한 감투다.  고등학교 때는 건강이 더 좋지 않아 학교를 제대로 다닌 것만도 다행일 정도였다. 

1979년 항공대학을 입학했을때는  박정희 대통령치하로  봄만 되면 대학은 반정부투쟁으로 홍역을 치렀다. 주로 서울대와 연고대가 앞장섰는데 그 외의 대학이라고 조용했던 것은 아니다. 1975년이었던가. 박 대통령의 유신철폐를 외치며 서울대 김상진 학생이 군중 연설 중 할복자살을 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은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나에게는 그러한 상황들이 잘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그래도 박 대통령 덕에 혼란이 진정되고 생활수준이 나아진 면이 있는데 할복까지 하며 저항해야 하는 이유가 선뜻 와 닿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 이후 많은 학생회장들이 대중 연설 중 할복을 시도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던 때였는데, 항공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눈부시게 푸른 봄날 강당에 학생들을 모아 놓고 당시 학생회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는 연설 끝에 할복을 시도했는데 할복이 되지는 않았고 복부 피부에 자상을 내는 정도의 해프닝이 되어 버렸는데, 분위기상 데모를 안 하기도 그렇고, 하기도 그런 어정쩡한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해 10월 26일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전두환이 정권을 잡는 일련의 일정 속에서 ‘뭔가 이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광화문과 서울역을 누비며 데모를 하고 도망도 다녔다. 그러나 그때도 절실한 이념으로 무장되어 앞장서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렇게 평범한 대학생활 끝에 졸업을 했고, 공군장교로 군복무를 했다. 전역후 서른 살에 인제의대에 들어갔는데 참으로 암담했다. 젊은 나이에 또 6년을 공부만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니 끝이 보이지도 않는 긴 터널의 입구에 선 느낌이었다. 그래도 어쩌랴. 내가 선택한 길이니 열심히 공부를 해야 했다.

돈이 없으니 공부라도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타야 했다. 그런데 본과에 올라가니 해야 할 공부가 너무 많아 아르바이트도 안하고 공부에만 전념하는 후배들을 따라갈 수도 없어 성적 장학금도 받을 수 없었다. 나이 들어 두 번째 대학을 다니는 것도 죄송한데 넉넉지 않은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학생회장에 출사표를 던지다 

본과 2학년 2학기, 이제 2년 남짓 남았는데 학비를 조달할 일이 막막했다. 그래서 학생회장이 되기로 결심했다. 학생회장이 되면 학교에서 사무실을 내주니 거기서 숙식가지 해결하고 학비까지 면제받을수 있다.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학생회는 대부분 운동권 아이들이 대대로 독식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렇지만 다행히 나는 학급에서 나이도 많은 편이고 거의 모든 학생으로부터 마치 정신적 지주처럼 존경(?)내지는 인정을 받고 있었다. 

먼저 나는 지금까지 학생회를 이끌고 있던 운동권 아이들을 만나서 나의 생각을 말했다. 처음에는 의외로 흔쾌히 나의 생각에 동의를 하며 “형이라면 우리가 도와드려야죠.”라고 답을 하더니 다음 날 자기들끼리 논의한 결과 “형과는 추구하는 노선이 달라서 안 되겠다.”고 말을 했다. 자기들 조직을 대표하는 후보를 내야겠다는 것이다. “그래! 그럼 경선을 하자!”고 제안했다.  오히려  경선이 더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고 도전정신이 생겼다.  

당시 비교적 건강도 좋았고 나의 생각에 따르는 학생들이 많기도 했고 모든 면에서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가까이 있는 몇 명을 불러 참모로 임명하고 선거 체제로 돌입했다. 예과 200명을 모아 놓고 한 번, 본과 400명을 모아 놓고 한 번, 두 번의 연설기회가 있었는데 두 번 다 내가 생각해도 성공적인 연설을 했다.

당시 본과 400명 앞에서 연설을 할 때, 회장 후보인 내가 연설을 하고 이어서 런닝메이트였던 부회장 후보인 상훈이가 연설을 했다. 내 연설 마무리에 ‘이번 선거에 나를 선택해 주신다면 여러분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맑은 수채화 같은 추억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끝을 맺었다. 그런데  이 말에 너무 감동했는지 상훈이가  연설 도중 내가 했던 구절을 그대로 반복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해프닝이 있었다. 

 

김기천 (주)닥터킴 대표
· 가정의학과 전문의
· 인제대학교 백병원에서 수련
·한국항공대학교 기계공학 학사
· 제19대 대통령 선거 예비후보
· 제20대 대통령 선거 예비후보
· 김기천 TV 운영중 · 300만 불 수출의 탑 수상(2023)
· 대한적십자사 최고 명예장 (2021) 저서- 나의 사업 나의 건강 그리고 대통령 출마(2021) 1판 2판 2025년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