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태와 강우규, 그리고 대동단
Korean Academy of the History of Density
지난 호에 이어 ▶
1936년 차경석이 사망하자 보천교는 강제로 해산되었다. 보천교의 십일전을 강제로 철거하려 하였다. 이종욱은 십일전을 서울로 옮겨와서 태고사(지금의 조계사)를 지을 때 실무자였다. 보천교 정문은 내장사 대웅전이 되었는데 2012년 10월 31일 오전 2시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용오정사(龍塢精舍)는 고창군 무장면 덕림리에 있는데 용오는 정관원의 호로 정관원의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당대에 유명한 유익서 대목장이 지은 건축물이다. 정관원과 기삼연의 영정이 있다.
유익서 대목장은 차천자궁을 지었는데 그 솜씨를 아까와 한사람들이 차천자궁을 헐어버리는 대신 뜯어서 옮겼다. 정관원은 의병을 모집하여 항일투쟁에 앞장섰다가 고종황제가 승하한 뒤에 통곡하며 지내다가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홍의재 앞에 있는 강당인 경의당에는 의친왕의 친필인 ‘金聲玉振’의 친필행서가 있다. ‘金聲玉振’은 八音을 연주할 때 먼저 종을 치고 마지막에 경을 친다는 뜻으로 시종일관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지덕을 겸비하라는 내용이다.
보천교의 2인자 김홍규의 자제 김탄허는 1936년 경 오대산 한암 스님 문하에 출가하여 지암 이종욱스님과 인연이 있다.
9) 나창헌과 김중옥(金仲玉, 庸源)
1920년 3월 베이징에서 김가진, 신규식, 박용만, 이종욱, 손영직, 고광원, 김의한, 나창헌, 김중옥등이 대동단 해외 본부를 조직하였는데, 박용만은 대동단 무정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대동단 사건 관련자인 나창헌과 김중옥이 상하이에 온 후 대동단 해외본부에 가담하였다. 대동단 해외본부는 1920년 4월 월정사 승려 이대정을 ‘상하이임시정부 의원참모사’ 사령으로 삼고 박영효를 통해 의친왕을 다시 상하이로 모셔가려고 꾀하다가 이대정이 일본 형사에게 1920년 8월 16일 체포되어 실패하였다.
김중옥은 가명으로 대동단에 참여하였으며 본명은 용원이다. 3·1운동 후 상하이(上海)
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원이 되었다.
김중옥은 독립운동 및 외교후원회 자금의 조달을 위하여 국내에 들어와 대동단을 조직하고 의친왕과 접선하여 상하이로 망명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고 홀로 망명하였다.
김중옥은 1921년 5월에는 김구의 후임으로 임정경무국장에 임명되었으며 동시에 의정원 청원징계 상임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그 해 11월에는 태평양회의에 관한 임시정부의 후원과 지도를 목적으로 외교위원회를 조직하고 박찬익의 후임으로 간사가 되어 태평양회의 축하회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김중옥은 홍진, 신익희, 이진산 등 25명과 함께 연서한 청원서를 재미 각국 대회자에게 송부하여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김중옥은 1924년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독립공채를 가지고 귀국하여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이튿날 병사하였다.
10) 한국 노병회
한국 노병회는 1922년 10월 28일 상하이에서 김구(金九), 이유필, 여운형을 중심으로 향후 10년간 1만 여명의 노병을 양성하고, 100만원 이상 전쟁비용을 조성한 후 무장투쟁을 통해 조국의 광복을 쟁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립되었는데, 김구(金九)는 한국 노병회를 임시정부 산하 지원단체로 발전시키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때 나창헌은 노병회 통상회원이었으며, 후에 나창헌은 철혈단 단장을 역임하였다.
11) 의친왕 처남 김춘기
1915년 신한혁명당 사건이후 의친왕의 독립운동은 의친왕의 처남인 김춘기가 수행하였다. 김춘기는 베이징(北京)에서 파견되었다. 조선민족대동단 사건 재판기록을 보면 김춘기는 어렸을 때 한문을 배웠고, 13세 때 중앙청년회중학과에 입학하여 17세에 졸업하고, 18세 때 영국 런던에 건너가 폴리텐니크 대학에 입학하여 입학 준비 교육을 3년 동안 받고, 21세 때 미국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에 있는 연합태평양철도회사에서 서기로 1년 동안 근무하였으며, 캘리포니아 주 포클리시 캘리포니아 관립대학교 상과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하였고, 1917년 10월 13일 서울에 돌아왔다.
1918년 2월 평안북도 구성에서 금광업에 종사하다가 실패하고 5월에 다시 귀경하였다. 의친왕은 김춘기를 통한 정보를 믿고 움직였다.
김춘기는 부여군 임천 사람 강석룡(214)을 알고 있었는데. 강석룡은 그 후 중국 방면으로 건너갔다가 상하이(上海) 방면을 돌아 서울로 왔는데 김춘기가 사동궁에 거주하던 중 내방하
여, 의친왕 전하를 상해임시정부로 모셔갈 것을 희망하였다. 김춘기도 외유의 뜻이 있었고
조선에 있어도 영어를 가지고는 취직 자리가 없어 어딘가로 가 봉급 생활이라도 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으며, 의친왕 전하께서도 또한 귀족 등이 처우에 대해 불평이 있는 김에 ‘하나의 평민이 되어 자유의 땅에 서 생활하고 싶다.’고 이야기하신 일이 있기 때문에, 김춘기도 강석룡의 요청을 승낙하여 의의친왕 전하께 말씀드렸다. 의친왕 전하께서는 ‘돈이 없어서는 어떻게 할 수 없지 않느냐?’고 대답하시므로 그 뜻을 강석룡에게 전한 일이 있다. 그 후에도 의친왕 전하를 면담할 때에는 언제나 불평 이야기가 나와 ‘公이라는 신분을 벗어나 돈벌이를 해서라도 자유 생활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이야기뿐이셨다. 그런데 10여 일 전 ‘돈이 되었으니 함께 중국 방면으로 가자.’는 말씀이 계시어 김춘기도 동반코자 기뻐하고 있었다. 그 돈이 조달되는 것이 지난 9일이라는 것이었는데, 다른 파의사람이 의친왕 전하를 바꾸어 모시고 가려 했던 것이다. 10일 오후 4시경 수송동 김춘기가 자기 집에 돌아왔더니 강석룡이 있다가 ‘어젯밤 전하가 나가셨다. 다른 파가 전하를 데리고 나갔다.’고 놀란 모습으로 이야기하며 ‘나를 따라가자. 전하를 우선 귀가하시도록 부탁하겠다.’고 하므로 그를 따라 창의문 밖에 나갔다가 세검정 못미처에서 수인당 김흥인과 간호부가 돌아오는 것을 만났는데 두 여자는 ‘큰일이다. 전하는 오늘 저녁 출발하여 우리들에게 당신과 함께 용산에서 기차를 타고 오라는 것이니 함께 우선 사동궁으로 가자.’고 권하였으나, 김춘기는 ‘강석룡은 김춘기가 전에 의
친왕 전하께 말씀드린 일이 있는 사람이므로 강석룡의 보증으로 우선 환궁을 말씀드리고자
지금 계시는 곳으로 가는 도중이니 계신 곳까지 가자.’고 하여 강석룡과 동반해서 잠시 갔던 바, 개울가 바위 위에 청년이 3명 있고, 그 밖에 한 명 상복을 입은 청년215) 이 위에서 그곳으로 오므로 강석룡이 ‘의친왕 전하는 어디에 계시느냐?’고 묻자, 청년은 ‘그것을 물어서 어떻게 할 것이냐?’고 싸웠으며, 강석룡은 ‘우리들이 이미 전하를 모시고자 준비를 갖추고 있는데 너희들이 난폭하게도 바꿔쳐서 의친왕 전하를 모셔간다 함은 괘씸하다. 그러한 난폭한 짓을 하면 관헌에게 발견되니 우선 환궁한 후 조용히 모시는 것이 상책이리라.’고 주장하였으나, 그들은 의친왕 전하가 한번 환궁하시면 다시 외출하는 것은 곤란하므로 이대로 모셔감이 득책이라고 서로 싸우고 있던 터에, 그들 중에는 시간이 지체되니 두 사람을 데리고 오라는 눈치로 전하께서 계시는 곳으로 가자고하여 강석룡이 갔는데, 한 청년은 나에게 ‘당신은 부인을 출발하지 않도록 하라. 전하는 환궁하시도록 주선하겠다.’고 하므로 강석룡(姜錫龍)이 모시고 환궁할 것으로 믿고 수송동으로 귀가하여 저녁 식사를 마치고 사동궁 부속 건물로 가서 수인
당을 불러 ‘출발을 유예하라. 전하는 곧 귀환하실 것이라.’고 그들이 김춘기(金春基)를 속인 줄을 모르고 그녀에게 그대로 알렸는데, 10일 밤 오전 1시경까지 기다리고 있었으나 환궁하지 않으셨고 벌써 경찰이 의친왕 전하를 수색하는 소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김춘기가 증언하기를 강석룡은 장래에는 조선도독부를 두게끔 내정하고 있으므로 의친왕 전하를 도독으로 할 작정이라고 말하였고, 동행에 관해서도 자기 외에 2~3명의 동지가 있다고 이야기하였으나, 누구누구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의친왕전하를 상하이로 데리고 가는 노정은 얼음이 얼기 전이면 안뚱현에서 화물선으로 가고, 얼음이 언 후면 풍티엔과 텐진은 기선으로 간다고 하였다.
김춘기가 사동궁의 부속 가옥에 거주할 때인 지금으로부터 5주일 쯤 전, 강석룡이 오후
8시 반경 동생인 강석린에게 김춘기의 집을 가르쳐 달라고 내방하여, 1년 7~8 개월 만에
만나게 되었는데, 강석룡은 두 번 가량 국가에 관해 처형을 받은 사람으로 ‘지난 번의 처형 이후로는 나창헌임. 이을규, 정안립은 망명당시 상복을 입었는데, 정안립의 조언을 의친왕과 대동단이 수행한 흔적이다. 안뚱 이륭양행에 도착한 후의 계획을 김춘기가 일제에 자백한 내용으로 의친왕과 정안립이 사전에 연락된 흔적이다. 하얼빈, 창춘방면을 편력하고 그로부터 상하이(上海)에 가 있었다. 현재 상하이에 있는 한국 독립 임시정부는 마침내 독립을 확실한 것이라 하여 나라를 소생시키는 운동 중인데, 이번에 전하를 임시정부에서 모셔오라고 하여 서울에 어젯밤에 도착했다.
상하이임시정부는 물론 지린(吉林)의 동지 등도 전하께서 오시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 전하께서 오신다고 하면 인심을 하나로 합칠 수 있으므로 반드시 가시도록 주선하라. 전하께 특별히 자격은 없으나 인심을 통일하는 데에는 전하를 제외하고는 달리 없다.’고 하였으며, 또한 미국 은행가가 와서 국채 3백만 원을 임시정부를 위해 모집한다는 계약도 성립됐다고 자꾸 권하였으므로, 처음에 진술한 대로 전하께 말씀드렸더니 ‘돈이 없어서는 어떻게 할 수도 없다. 빈 손으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다.’고 대답이 계시었다. 미국 은행가 운운에 관해서는 ‘미국이 조선을 위해 어째서 그러한 일을 하느냐?’고 조금도 신용하는 빛이 없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나, 전과 같이 밤에 세 번 가량 와서 전하께서 어떠한 대답이 계셨는가고 묻기에 앞서와 같이 대답했는데, 강석룡은 ‘시기가 늦으면 아무 것도 안된다.’고 하며 자꾸 결심을 채근하였다. 그 시기가 급하다고 하는 것은 국제연맹체결 전이라는 뜻이었다. 전부터 의친왕은 ‘쿠바나 스위스 등으로 건너가 자유 생활이 하고 싶다. 그 지방은 생활비가 싸고 기후도 좋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외유의 생각은 일어나셨으나 언제나 생각대로 되지 않았고 돈 조달을 위해 고심하고 계셨는데, 이달 7일 오후 7시경, 김춘기에게 의친왕은 9일에는 돈이 되리라 생각한다고 말씀이 계시어, 김춘기는 전부터 외유의 뜻이 있었으므로 목적을 달성하리라 믿고 강석룡도 한번 만나보실 것을 말씀드리고 출발 준비도 하려고 그날 밤 강석룡에게 통지하였으나, 아직 강석룡도 만나지 못하고 돈도 되지 않았으며, 9일 밤 같은 파의 사람이끌어냈던 것이다.
3~4주일 전에 강석룡이 ‘의친왕 전하께서 돈이 없어 외유할 수 없다는 말씀이신데 돈이
무엇인가? 돈이 없어도 의친왕 전하를 받들며, 식사도 드리지 않는 것 같은 일은 하지 않는다.’고 자꾸 재촉하므로 의친왕 전하께 말씀드렸으나, 그 대답은 ‘그래도 차용금이 많이 있다. 그 정리는 하지않으면 안된다. 수화당에게도 차용금이 있으므로 돈을 조달한 후에는 차용금을 갚고, 수화당은 전부터 토쿄의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 하고 있으니 여비라도 주어 보낼 사람은 보내고, 정리하지 않으면 출발할 수 없지 않은가?’고 대답이 계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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