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태와 강우규, 그리고 대동단

2016-07-23     세미나비즈

지난 호에 이어 ▶

 

의친왕 전하의 외출 4·5일 전에 아침 일찍 수송동 김춘기의 집에 강석룡이 韓과 崔1)와 같이 와서 2매의 증명서를 건네주며 이것은 안뚱현에서 경성을 왕복하는 여행증명서인 즉 이것을 가지고 안뚱현으로 돌아가는 것 같이 한다는 것이었으며, 그날 낮에 의친왕 전하께 강석룡의 설명과 함께 드렸더니 그대로 책상 서랍에 넣으셨다. 

1919년 대동단 사건으로 김춘기의 거동이 일제에 노출된 후, 의친왕은 이기권과 유정순을 밀사로 활용하여 이회영, 양기탁, 정안립, 유동열, 김규흥, 박용만 등 독립운동 지도부와 비밀리에 연락하면서 독립운동을 남모르게 지원하였다.


12) 유경근

유경근은 강화도 월곳리 303번지가 자택으로 강화군과 개풍군에 보창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재직하였다. 유경근은 1919년 3.1운동 시에 강화와 김포의 지휘관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대동단 사건의 주역이다. 1920년 미국의원단 내한 시에 광복군 군영 특파결사단의 활동을 돕기 위해 무기를 서울 내자동 자택에 은닉하였으며 후에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으로 망명하여 이동휘3)가 운영하는 군관학교에 사재를 헌납하고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과 지원병을 모집하여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으로 보내다가 체포되어 3년 반의 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유경근은 대동단4)의 11개지단5) 중 군인단의 총대장을 맡았다. 만주 독립군의 위원모집은 대동단원에 의해서만 이루어졌고, 이 일은 모두 유경근이 총괄하였다.

당시 유경근은 강화도의 교육자로 알려졌으며, 본격적인 대동단 활동과 관련하여 만주와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등 해외파와 두루 교분을 나누었다.

유경근은 노준, 조규상, 현완준, 위계후, 고경진, 조주현, 김형권 등 군인지망생에게 신의주의 김성일6) 앞으로 암호로 된 소개장을 써주어 7월 4-5일경에 이들이 남대문역에서 신의주로 출발할 수 있도록 주선을 해주었다. 즉 유경근은 조직의 암호를 관장할 만큼 특별한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은 조규상이 일제의 밀정이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유경근은 금광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이 돈으로 유경근은 자기집에 광창학교를 설립하고 1906년 7월 보창지교로 개편하며, 1909년 광명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졸업생은 10명을 배출하였다. 광창학교를 보창지교로 개편한 것은 보창학교의 설립자인 이동휘와 유경근의 관계가 돈독했던 것을 보여준다.7) 이동휘는 1902년 강화도 진위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유경근은 감리교8) 잠두교회의 분회를 지어 헌납하였다. 의친왕의 땅은 김포군 월곶면 고막리에 있었는데 염하9) 건너 강화도에 있는 유경근을 의친왕이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13) 장현식

장현식은 1896년 9월 17일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에서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앙고등보통학교가 설립될 당시 거액을 기부하였으며, 고려대학교가 설립될 당시에도 재단에 사재를 기부하여 교육을 통해 침체된 민족의 기운을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동아일보사가 창간될 당시에는 인쇄 장비를 구입할 수 있도록 거금을 기부하였다. 1919년 4월 비밀결사인 대동단이 창단되자 운영 자금 3,000원을 이건호에게 제공하고, ‘대동신문’의 재정을 담당하였다가 체포되어 1921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그 후 민족어 보존을 염원하여 ‘조선어사전’ 편찬을 위하여 3,000원을 제공하고 지인에게도 권유하여 1,400원을 제공하게 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고 4년간에 걸쳐 옥고를 치르다 8·15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이 때 일경은 장현식의 혀에 대못을 박는 고문을 자행하였는데 이 일로 장현식은 말더듬이로 살아야 했다.11) 제2대 전라북도지사로 재임 100일만에 물러났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납치되어 평양 재북인사묘역에 묻혀있다.

 

14) 기생문화

이토오 히로부미는 1906년 3월 조선통감으로 부임할 때 4명의 화류계 여성들도 데려왔다. 이토오 히로부미는 “취해서 미인의 무릎을 베고 눕고, 깨어서 천하의 권력을 잡는다.”는 한시를 지을 정도로 여자, 술과 정치를 동일시했던 인물이다. 임종국은 “일제는 한 손에 대포와 한 손에 기생을 거느리고 조선에 건너왔다.”고 말했는데 손병희와 의친왕은 일제의 기생문화를 독립운동에 역이용하였다. 이러한 정치문화는 1970년대까지 요정정치로 이어졌다.


VII. 봉오동 전투(1920년 6월 7일)

최진동은 서전서숙을 통하여 이상설과 교분을 쌓게 되었고, 헤이그(Hague) 밀사로 임명된 이준을 연해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안중근과 사포대에서 같이 활동한 황병길15)도 최진동과 같이 옌볜과 연해주 지역의 항일 무장투쟁을 논의 하였는데 1907년 말부터 1908년 초까지 안중근도 투먼회막동에 체류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최진동은 이동휘의 처남인 오병묵과 항일 무장투쟁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최진동이 의친왕을 만나러 안뚱으로 간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의친왕의 망명사실을 최진동에게 알려준 사람은 정안립16)이다. 전협은 대동단이란 단체를 조직하여 일제를 현혹시켜 자기가 모든 것을 뒤집어쓰고 배후자인 세력을 보호하였다. 이범윤17), 조성환, 정안립, 이동휘, 최진동 등이 뒤에서 움직여서 북간도의 독립군단체를 서로 통합시켜 봉오동 전투를 승리하도록 하였다.

1919년 11월 안뚱에서 국내로 진공하라는 의친왕의 명령을 받은 최진동은 봉오동으로 돌아가 자신의 자위단과 박영의 장정 60여명을 토대로 1919년 12월31일 군무도독부19)를 건립하고 무기를 구입하였으며20), 소작농 가운데 장정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시켰다. 건립 초기 군무도독부의 총 병력은 200여명이었다. 1920년 봄부터 최진동은 봉오동 근거지에 귀틀집형태의 병영을 만들고 연병장을 건설하였다. 봉오동은 최진동의 땅이며 본거지로서, 군무도독부의 근거지였다.

최진동과 중국 지방 당국자들은 절친한 사이로 중국 지방 당국자들은 봉오동에서 일어나는 일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또한 최진동은 귀화입적한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일본영사관에서는 최진동이 항일운동을 하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봉오동, 왕칭, 석현, 대감자, 밀강, 석건, 걸만동 등지에는 조선인 지주들이 많았는데 김활석과 이태성 등은 최진동이 군무도독부를 건립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들의 자위대를 도독부군으로 편입시키는데 합의하였다.

군무도독부는 사립 봉오동 학교에 군사 훈련반을 설치하고 독립군 전사들을 번갈아 입교시켜 철저한 군사교육을 받게 하였다. 군사지식이 있는 중대장을 교관으로 임명하여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러시아 군인과 중국군 장교를 초빙하여 군사훈련을 돕게 하였다.

1920년 4월 7일 최재형이 4월 참변으로 순국하자, 장남인 최기욱은 봉오동으로 와서 최진동과 같이 무력 항일투쟁을 하였다.21)

1920년 6월 당시 일제자료에 의하면 군무도독부의 병력은 약 600명이고, 군총 약 400정, 권총 약 50정, 수류탄 약 120개, 기관총 2문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였다.

최진동은 군무도독부를 건립한 후 재산을 털어 총기와 탄약등 군수품을 사들여서 독립군을 최신식 무기로 무장하게 하였다. 그리고 국내진공작전을 계속하면서 군사력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하였다.

1919년 겨울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독립군은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과 양하청의 독립군 부대와 연합하여 두만강 건너 회령, 종성, 온성등지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였다. 1920년 회령전투에서 군무도독부등 독립군 연합부대는 일본군 군영을 기습 점령하고 일본군을 300여명을 사살하였다.

1920년 3월에는 종성 일본 헌병대를 습격하여 많은 무기와 탄약을 노획하였으며, 이어서 온성읍을 함락시켰으며, 온성군의 미산 헌병 주재소를 공격하여 일본군을 섬멸하였다. 1920년 4월 18일에는 향당동 일본 경찰서를 습격하였다.

옌볜지역 독립군부대는 이용의 경호대, 안무의 대한국민회군, 서일, 김좌진의 대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김규면의 대한신민단, 방우룡의 대한의민단, 이범윤의 대한광복단과 의군부,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황병길의 훈춘한민회 등이 있었다.22)

1920년 5월 하순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구춘선의 대한국민회, 그리고 홍범도23)의 대한독립군이 연합하여 대한 북로독군부를 결성하였다. 대한국민회의측 행정사무를 관장하고, 군무도독부와 대한 독립군측이 군사업무를 담당하였다.

1920년 8월 일본의 “불령선인 근거지 및 각 조직에 관한 건”에는 “ 최진동군무도독부 약 670명, 홍범도와 안무부하 약 550명 도합 1,200명으로서 보총 900자루, 권총 200자루, 기관총 2정, 폭탄 약 100개, 망원경 7개, 군총 한 정당 150발”이라고 기록되어 있다.24)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에 위협을 받은 일제는 1920년 6월 봉오동에 침입하다가 독립군에게 섬멸당하였다.25)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가 시작되었다. 최진동은 대한총군부의 총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독립군을 인솔하고 동부 전선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최진동이 지휘한 동부 전선에서 전개된 전투들 중 하마탕 서북쪽에서의 전투를 제외하고 모두 대한총군부 독립군들이 주동하여 일본군을 습격한 전투였다.

최진동이 인솔한 대한총군부 독립군들은 동부 전선에서 비록 분산하여 전투를 전개했지만 이런 전투들은 일제의 토벌 계획을 교란하고 홍범도와 김좌진이 지휘한 서부전선의 독립군 부대를 지원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김규식은 서간도 독립군들이 소규모 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북간도 독립군은 보다 대규모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26) 이들 부대가 통합되기 전에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는 바람에 독립군들은 시베리아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다.27)28)

봉오동 전투는 의친왕의 명령에 의해서 최진동이 승리한 전투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전투였다.29) 30)

 

VIII. 결론

1. 함석태(咸錫泰)의 부친 함영택(咸永澤)은 황실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함영택(咸永澤)과 강우규(姜宇奎)는 고향친구였다. 함석태(咸錫泰)는 강우규(姜宇奎)의 손녀 강영재(姜英才)의 학비를 뒷바라지하였으며, 대한제국대황제보령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각(大韓帝國大皇帝寶齡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閣)의 철제문을 함석태(咸錫泰)가 보관하였다가 고종황제(高宗皇帝)께 바쳤다.

2. 함석태(咸錫泰)는 순종황제(純宗皇帝)와 윤황후(尹皇后)등을 치료하였다. 함석태(咸錫泰)의 존황의식은 황실독립운동과 관계가 있다.

3. 강우규(姜宇奎) 의거와 대동단 사건은 부분적으로 관련자가 일치하며, 황실과 관련된 조직에서 일으킨 사건이다.

4. 강우규(姜宇奎)에게 수류탄을 제공한 사람은 봉오동의 최진동(崔振東) 장군이다.

5. 강우규(姜宇奎) 의거와 대동단 사건, 봉오동전투는 무오독립선언, 3.1만세운동과 계속적으로 연결된 황실독립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