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의자의 올가의 초상 (Portrait of olga in the arm chair)
이 작품은 이탈리아 여행과 고대 로마 조각과의 접촉한 시기에 즈음하여 피카소가 제작한 여러 점의 앵그르풍의 고전적 그림들 중 하나이다.
1915년을 넘어서며 고전적 분위기를 그리기 시작한 피카소는 1917년 발레 '퍼레이드'의 무대장식과 의상을 위해 로마로 가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들을 통해 공허한 눈빛을 가진 거대하고 무거운 인물들을 시도하였다. 뜨겁게 표현된 색들과 부드럽고 둥근 인물들의 형태는 이 시기 무용수들, 해수욕객들, 신화 속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고대 예술과 고전적 미술로부터 받은 영감을 반영한 것이다. 뒤따라 이어지는 피카소의 다양한 시도에 따라 분류하기 힘든 끊임없는 실험과 시도의 시기로 연결된다.
올가는 러시아 육군 대령의 딸로서 1912년에 디아기레프 발레단에 있었던 무용수출신이다. 피카소는 1917년 이탈리아 여행 중 올가를 만나서 이듬해인 1918년 7월에 결혼하였는데 시인 쟝 콕도, 아폴리네르 등을 초청하였다. 피카소가 올가를 맞이한 후부터 그 생활은 규칙적으로 정리되어 갔다.
많은 여자를 거느렸던 피카소는 새로운 연인을 만날 때마다 작품의 방향 또한 변화를 맞이한다. 이 시기 또한 어머니와 자식 간의 애정 어린 작품들을 많이 그렸다. 다분히 앵그르풍의 리얼리즘이 보이는 이 작품은 입체주의적 표현을 싫어하였던 올가가 원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올가를 그린 작품들이 있으나 그 표정들은 한결같이 우수에 잠겨 있다.
이 작품에서도 여성스러우면서도 다리를 꼬고, 한쪽으로 걸터 놓은 손에서 따분한 시간을 보내는 듯한 공허한 인상이다. 화려한 장식임에도 전체적으로 무채색화된 의상이 침울함을 더해 준다.
손수건을 쥐고 우는 여인 (Weeping Woman with Handkerchief)
「게르니카」의 습작에서 시작된 이 작품은 사진작가였던 그의 연인 도라 미르를 주인공으로 그린 두번째 버전의 그림이다. 피카소를 매료시킨 주제로서 「게르니카」 완성 후에도 피카소는 여러 점의 동일한 주제의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피카소는 여인들에게 많은 테마를 주고 작품을 만들었다. 잠자는 여인 「춤추는 여인」, 「독서하는 여인」, 「거울을 보는 여인」, 「포옹하는 여인」. 「울부짖는 여인」 등 그 변화는 더 많다. 배경의 검은색 속에서 선명하게 얼굴과 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이 작품에서 눈물의 표현은 사실적인 것을 피하고 추상적이며, 기 호적 눈물로 나타내어 흐르는 것이 아니라 튀어나오는 것을 매우 알기 쉽게 표현하고 있다.
아동화 같이 소박하고 그리고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이 작품은 간결한 색채로 배경의 어두움 속에서 강렬한 황색의 인물이 두드러져 보인다. 이 시기 피카소는 독특한 입체파의 발전적 경향의 작품들을 보여주고 있으며, 확고하게 국제적인 작가로서 자리 잡았던 성공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작품 양식은 입체파 공간을 고전주의적 견고성과 결합시킨 복합적 입체파 시기라 할 수 있으며, 이후 뒤따르는 피카소의 작품 경향은 지속적으로 풍성하고 변화무쌍한 실험의 주기들이 번갈아 나타나며 통일된 양식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한다.
게르니카 (Guernica)
이 작품은 1930년대에 그려진 피카소의 통렬한 파시즘을 고발한 반전 작품이다. 작품의 주제는 당시 독재정권인 프랑코를 지원하는 나치의 무차별 폭격으로 폐허된 게르니카의 참상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와 항거정신이었다.
게르니카의 사건은 1937년 4월 26일 히틀러가 3시간 동안이나 바스크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를 무차별 융단 폭격하여 주민 7천 명 중 1천 명 이상이 학살당하고 도시 전체가 불바다가 되었던 사건이었다.
이에 분노한 피카소는 거의 8m 가까운 너비에 3m50cm 크기의 거대한 대작 ‘게르니카'를 한 달만에 완성하게 되었다. 피카소는 이 파시즘의 침략에 의연하게 맞선 게르니카 시민들의 분노를 담아내고 있다. 용기와 혁명적 정신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그들의 분노를 담아내고 있다. 애초 이 작품은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 벽화에 대한 주문을 의뢰받아 진행된 작품으로 당시 다른 주제로 그려질 예정이었으나 그의 연인 도라 미르의 적극적인 조언으로 게르니카를 제작하게 되었다.
“회화는 공격적인 전쟁의 도구”라고 말한 피카소의 이 「게르니카」는 파시즘 독재와 공포 앞에 의연히 맞선 분노의 외침이며 혁명이었다. 결국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스페인이 마르코 체제가 되자 그림 반입을 거부하고 스페인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회복되었을 때 돌려달라며 뉴욕 미술관에 무기한 대여해 주었다.
결국 1981년에 민주화된 조국 스페인의 품에 이 작품을 안기게 된다. 이 작품은 극적인 구도와 흑백의 치밀한 대비효과에 의해 죽음의 테마를 응결시켜 20세기의 기념비적 회화로 평가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