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모든 행위는 표현적이며, 동작은 의도적으로 표현된 행위이다. 모든 예술은 작가와 그가 작업하던 상황의 표현이다. 그러나 일부 예술은 강한 감정과 감정으로 충만된 메시지를 전하거나 그 감정을 발산시켜주는 시각적 동작을 통해 우리에게 감동을 주도록 의도되어 있다. 그러한 예술이 곧 표현주의 예술인 것이다.20세기 미술의 대부분은, 특히 중부 유럽의 미술은 이와 같은 종류였으며, 거기엔 표현주의라는 라벨이 붙여져왔다(문학, 건축, 음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이와 비교될 만한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표현주의라고 불리는 운동은 결코
1907 년경의 마티스 작품은 그가 전에 추구하던 것을 꾸준히 보여주는 데 반해, 드랭은 자신의 아수파적 작품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듯하다. 1906~-07년경의 드랭의 작품들에 대한 정확한 연대는 불확실한데, 이 당시 그가 여러 가지 상이한 양식들을 동시적으로 실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그림 1)과 같은 작품은 템즈가 풍경화와는 개념상 아주 먼 것이긴 해도, 아마도 그것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그려졌을 것이다.드랭은 서너 개의 유사한 주제를 파고들었는데 우리는 거기서 야수파 회화에서 나타나는 소재
1890년에 ‘하나의 그림이란 전투마나 누드나, 또는 어떤 일화이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하나의 평평한 면, 즉 어떤 일정한 질서로 구성된 색채로 덮인 면이라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한 것은 드니였지만, 이것을 잠재적인 혁신적 개념으로 구현한 것은 바로 마티스였다.차분하고 소박한, 주로 종교적 성격을 띤 드니의 그림들은 그의 발언이 시사했던 가능성들을 탐구할 조짐조차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실재로 장식적인 미술에 대한 마티스의 해석은 드니 자신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니의 작품들은 금세기 초에 파리에서 전시됐던 다
무기력한 관능의 분위기는 보들레르의 상상력과 맞먹는 시각적인 등가인데, 이것은 부드러운 분홍색과 초록색, 그리고 나긋하게 몸을 굽혀 포옹한 남녀의 모습에 의해서 홀륭하게 표현되고 있다. 모든 것은 가능한 한 중량감이 없게 표현되어 있으며, 배경의 흔들리는 나무들조차도 그것들이 표현하고 있는 분위기처럼 가변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마티스의 작품이 수년간의 끈질긴 실험과 연구의 결과라는 것을 강하게 느끼게 되는데, 왜냐하면 마티스는 그러한 질서와 정확성을 자기의 그림들에 구사하여서 어느 것도 우연발생적인 상태로 남겨 놓지 않
그는 아수파들 가운데 이렇듯 새로운 영향들에 긍정적으로 반응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몇 해 뒤에 오통 프리에스(Ochon Fricz)가 야수파가 무엇인가에 대해 자기의 생각을 정의했는데, 이 아이디어는 마티스가 노렸던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프리에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야수파란 단순한 태도나 제스처가 아니라 논리적인 발전, 즉 우리가 전통의 범주들 안에 아직 머물러 있을지라도 우리의 의지를 그림 위에 표현할 수 있는 그러한 필요한 수단인 것이다.‘ 그러나 프리에스 같은 몇몇 화가는 바로 이러한 전통에의 의존에 의해 제한
[덴탈뉴스=성완경]그러나 그러한 불가피한 공세에 정면으로 맞선 사람은 마티스였다. 커다란 모자를 쓰고 있는 자기부인을 그린 그의 초상화는 여권(女權)주의의 풍자적 만화와 같은 이해할수 없는 고약한 취향으로 해석되었다. 좀 지각이 있는 비평가들도 마티스가 지나쳤다고 느꼈다. 그들은 화가로서의 그의 재능은 인정했지만, 색채에 대한 새로운 자유와 친근한 주제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을 노골적인 괴벽의 증거로 간주해버렸다. 이 초상화는 색채와 기법에서 매우 화려했지만, 그의 아내를 모델로 한 두번제 초상화(그림 1)만큼 깜짝 놀랄 만한 것은
1004년 여름, 마티스는 시냐의 집이 있는 생 트론페(st. Iioper)에 머물고 있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인상파 화가 앙리 에드몽 크로스(Henri Edmond Cross)가 살고 있었다. 시낙의 점묘법론은 영향력이 있다. 그러나 마티스는 다른 화가의 화풍에 좌지우지될 만큼 취약한 신진화가는 아니었다.마티스의 이 작품은 세잔 (Cezanne) 이 욕녀에 대해, 고갱 (Gauguin)이 타이티 풍경들에 대해 열정을 보여주는 만큼이나 자신의 기법에 열중하던 시냐의 의도에 대한 아주 융통성있는 해석이었다. 그 작품은
그의 가족은 대중적인 예술가의 이미지를 용납하지 않고 그가 택한 예술가로서의 길을 반대했다. 대가로서의 명망 따위에 결코 얽매이지 않는 마티스가 직접 그의 가족을 찾아가 드랭의 재질을 납득시켰다.드랭은 1901년 구필(Goupil) 화랑에서 열린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회고전에서 처음으로 마티스에게 블라맹크를 소개했다. 훗날 이 두 젊은 화가들은 이 작품전이 그들에게 끼친 커다란 영향에 대해 회상하곤 했지만, 실제로 당시의 그들의 그림에는 고흐에 대한 열정은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 뒤에, 특
모로는 상반성을 제자들에게 특별히 강조했지만 그의 특이한 작품들은 제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즉 루오의 깊은 종교적인 감각은 모로 자신의 신념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으며, 루오는 스승의 작품에 매우 강한 애착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제자들이야말로 그의 작품의 영향에 대해 어떤 대중이나 당대 어느 화가들보다도 더 많이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제자들은, 완성작품보다도 더 자유롭고 열정적이며 또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닌 그의 유화 스케치에서 그가 어떻게 실험하는가를 볼 수 있었다. 색채는 더욱 순수해지고 자유분방해서 표현하려는 주
1904~07년의 짧은 기간 동안 앙리 마티스(Henti Matisc), 앙드레 드랭(Andre Derain), 모리스 블라맹크(Maurice VIlaminck)는 동료학생들끼리 작은 모임을 결속하여, 나중에 야수파라는 명칭을 얻게된 화풍을 일으켰다. 원색의 사용과, 소묘 및 원근의 과장을 통한 야수파의 대담한 표현의 자유는 이들의 작품을 처음 대하는 사람들을 당혹케 했다. 그들은 단기간 동안이나마 당시 파리에서 활동한 화가들 중 가장 실험적인 그룹이긴 했지만, 20세기의 여러 예술운동 가운데서 아직까지도 가장 잠정적이고 정의하기
이 책은 1900년경부터 지금까지의 미술의 주요 개념과 전개 과정을 일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이다. 이 책을 내기 위해 특별히 기고된 글들은 요컨대 현대미술의 역사체계를 세워볼 목적으로 씌어진 것들이지만, 우선은 우리가 여전히 현 시대에 살고 있는 관계로, 이같은 주제를 대학 강의식으로 다루면서 이 시기에 대해 단순명쾌한 역사적·비평적 고찰을 한다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이다.그 다음으로 많은 개념 (Concepts)들이 (그리고 그 개념들을 결정적인 것으로 굳히면 서 대중화시켰던 「운동들 (movements)」 역시) 역사적으로 동
워홀의 작업의 특징은 반복적 이미지가 특징이다. 이는 전통적 예술에서 중시하는 원본성이 무시되는 개념으로 복제화되는 산업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것이다. 이미지 또한 광고에서 볼 수 있는 사진을 차용함으로써 상업적인 인쇄물을 연상시키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이처럼 비개성적이고 기계적인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워홀은 자신이 작품에 대해 지극히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는데, 이러한 태도는 워홀뿐 아니라 기타 다른 팝작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원래 다면화 그림은 중세 이래 제단화에서 일반적인 형식으로 쓰였다. 마릴린
팝아트 (Pop Art)팝아트는 1950년대 영국에서 일어나 1960년대 뉴욕을 중심으로 확산된 현대미술의 한 경향으로, 현대 소비사회를 반영하는 일상생활에 범람하는 기성이미지인 대중적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예술의 주제로 삼았던 미술사조이다.애초 파퓰러 아트 (Popular Art, 대중예술)를 줄인 말인 팝아트는 1954년 영국 비평가 로런스 앨러웨이가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시작되었는데, 그 발단은 매스미디어에 주목한 1950년 초의 리차드 해밀튼 등의 영국 작가로부터 시작되었다.그러나 1950년대 초기의 미국 화단을 휩쓸었던 추상표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적 작가로 네덜란드 로테르담 출신의 윌렘 드 쿠닝은 1926 년 미국에 건너가 잭슨 폴록과 더불어 추상표현주의의 양대 산맥으로 자리잡은 작가이다. 1948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던 그는 전 생애를 통해 단 한 번도 표현주의에서 이탈하지 않은 작가로 정평이 나 있다. 1950년대 거칠고 강력한 화법을 통해 여성을 악마적, 성적 대상으로 재형상화한 여인 연작을 통해 세계 미술계의 스타로 떠올랐다.소년 시절에는 미술장식회사 견습공과 동시에 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한 후 장식미술가로 어렵게 생활하던 중 1926년 미국에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인 잭슨 폴록은 전후 유럽의 현대 미술 화가들과 동등하게 인정받았던 최초의 미국 화가이다. 와이오밍 주 태생으로 형이상학적이고 초자연적인 정신성을 추구하는 신지학의 개념을 접하며 LA에서 성장한 잭슨폴록은 뉴욕에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펼친다. 한때 멕시코의 벽화가의 영향과 정신분석이론을 접한 폴록은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과 원시미술, 멕시코 신화 등에서 새로운 접근법을 발견하였으며, 1943년 구겐하임의 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통해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1945년 결혼과 함께 롱아일랜드의 이스트햄
장 포트리에 (Jean Fautrier, 1898~1964)파리 태생의 포트리에는 2차 세계대전 후의 유럽 화단에 있어서 새로운 예술운동인 앵포르멜의 선구자이다. 초기 영국으로 이주하여 미술에 입문하였으나, 1차 세계대전 참전 후 1920년대부터 본격적인 표현주의적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후 1940년대에 주요한 활동을 벌인 그는 프랑스의 재현과 모방으로서의 예술에 반하여, 불확실성과 순간적인 시간성으로 대표되는 '사건'으로서의 예술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1942년부터 「인질」 시리즈를 제작해 후도에 의한 비정형(앵포르멜)
추상표현주의 미술은 추상적 형식이면서도 전통적인 추상과 맥을 달리한 표현주 의적인 비정형의 특성을 지닌다. 즉, 전통적인 추상이 구상 회화의 경우처럼 인간, 사물, 풍경 등을 표현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을지라도, 삼각형이나 원 등의 기하학적 특징이나, 유기적이며 생물학적 형태가 암시되는 부정형적인 점(點)이나 선, 또는 면에 의해 생성되는 형상(形象, figure)이 주가 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회화의 틀을 갖추고 있다. 이 형상은 그 때문에 화면은 원근감을 잃고 평면화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역시 주제와 부주제의 관계를 유지하고
추상표현주의는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형성된 유럽의 앵포르멜 운동과 미국의 액 션페인팅으로 대별되는데, 앵포르멜 작가들로는 장 포트리에, 장 뒤뷔페와 볼스 등이 대표적이며, 잭슨 폴록, 윌렘 드쿠닝, 마크 로드코등이 액션페인팅(Action Painting)의 대표작가들이다. 미국의 액션페인팅은 뒤따르는 마크 로드코 등의 색면추상(Color-Field Abstract)에 직접 영향을 끼치게 된다.앵포르멜 (Informel)앵포르멜 미술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일어난 서정적 추상회화의 한 경향으로 기하학적 추상을 중심으로 한 정형화되고
앙드레 마송 (André Masson, 1896~1987)프랑스의 화가로 마송은 초기에는 그리스, 드렝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1923년 이후 아르토(Antonin Artaud), 레리스(Michel Leris), 미로, 아라공, 브르통 등과 친교, 쉬르레알리슴의 화가로서 활약하였다. 오토마티즘의 관념을 조형미술에 적극적으로 적용한 작가이다. 1942~1945년 도미하여 코네티컷에 거주하면서 충실한 작품활동을 하던 그는 1945년 귀국하여 몽환적(夢幻的), 주술적(呪術的) 화풍과 철학적 사색을 특징으로 하는 화가로서 중요한 위치를
막스 에른스트 (Max Ernst, 1891~1976)독일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에른스트는 같은 초현실주의 화가인 달리와 미로와는 또 다른 독특한 화풍을 갖고 있다. 그의 철학적인 그림의 배경은 그의 독특한 이력에서 비롯되는데, 그는 정신의학을 전공하고 철학을 공부하던 과정에서 거의 독학으로 미술에 입문하였다.1919년 쾰른에서 다다이즘 활동을 하였으며 그의 작풍의 특징은 콜라주와 그가 고안한 프로타주 기법에 있다. 1922~1942년 파리에 거주하면서 최초의 콜라주전을 열었으며, 1924년 이후로는 초현실주의에 적극 가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