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탈뉴스=김선영 기자] 을사년 새해가 밝아왔다. 을사년은 푸른 뱀을 상징한다. 푸른 배은 희망과 새로운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지금 국내의 상황은 너무나 혼란스럽다. 사상초유의 대통령 탄핵사태에 체포영장까지 내려졌다. 탄핵심판을 위한 헌재재판관 임명을 두고 대통령권한 대행이 탄핵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연설문에서 밝힌 윤석열은 공수처와 검찰의 소환에 3차례나 불응했다. 법을 수호하기 위해 검찰에서 일을 했던 수 십년을 일했던 윤석열 대통령이 가장 앞서 법을 어기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심정은 참으로 안타깝다. 

거기다가 무안항공 참사까지. 국내의 상황은 새해를 맞았지만 너무나 어수선하다. 이 모든 상황들이 바로   그 어느 누구도 중요한 순간에 자기희생이 아닌 자기 이익만을 앞세워 판단했기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러한 정치판의 행태는 치과계의 상황과도 다르지 않다. 사회를 이끌어가는 리더들의 자기희생정신이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독립 유공자이자 2024년 건국포장을 수여받은 전영창(1917∼1976) 선생은 애국심이 남다른

교육자였다. 가난 때문에 중학교조차 다닐 수 없었던 그는 보이어 선교사의 도움으로 전주 신흥학교에 진학했고, 그곳에서 교장 윌리엄 린튼 선교사의 눈에 띄어 일본 고베신학교로 유학의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싸우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 이후 전 선생은 주한미군 군종실에서 통역관으로 일하며 조국의 재건에 헌신했다.

1947년, 그는 미군 목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웨스턴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이어갔다. 그러나 졸업을 불과 2주 앞둔 시점, 6·25 전쟁이 발발하자 조국을 위해 즉시 귀국을 결심한다. 당시 학장이었던 뮬더는 말했다.

“2주일만 기다리면 학위를 받을 수 있는데 졸업하고 돌아가면 안 되겠나?"

그러나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제가 미국에 온 것은 미국에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조국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을 배우기 위해 온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동포를 배신하는 일이 됩니다.”

그의 결단에 감동한 학장은 특별히 학위를 수여하며 그의 귀국을 도왔다.

귀국한 전영창 선생은 피난민을 돕기 위해 경남구제위원회(현 고신의료원)를 설립하고 장기려 박사와 함께 무료 진료를 시작했다. 또한, 미군에서 제공받은 의료품과 구제품을 배포하며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전했다.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떤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 의학전문학교를 마치고 일본 나고야대학에서 의학사 학위를 받은 엘리트였지만 평생 아프고 힘든 환자들을 위해 살다 간 장기려 박사.

독립운동가로 일하고 나라를 위한 사업가로 살다가 당시 407억 원, 지금으로 따지면 6천억 원이 넘는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유일한 회장. 자신의 안락함을 뒤로하고 고난 속에서도 애국과 희생의 길을 택한 위인들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보면  그들이 걸어온 길은 고난과 자기희생의 길이었다.

사회의 리더를 자처하는 사람들.  대통령 선거나 지방선거 그리고 우리 대한치과의사협회 선거때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특징은 모두 국민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겠다. 치과계를 위해 헌신하겠다 며 유권자들의 표심을 자극한다. 자기희생을 각오하고 나선 리더들! 그들이 내리는 결단의 중심에 국민과 나라를 위하는 자기희생이 있기를 간절히 바래 본다. 
 

 

김선영 편집장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한국화과 졸업
홍익대학교 인문대학원 미학과 석사과정 수료
치과의료정책연구원 치과정책전문가 과정 1기 수료
아이키우기좋은 나라만들기 운동본부 홍보실장겸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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