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이런 딜레마에 직면했던 우리는 꽤 쓸만한 해결책을 찾아냈다. 바로 ‘자아’를 만들어낸 것이다. 자아란 우리를 위로해주고 ‘내면으로부터’ 인정받았다고 느끼게 해주는 나 자신에 대한 이미지다.
자아는 나의 취향과 의견, 세계관, 가치관으로 구성된다. 자아상을 구축할 때 우리는 자신의 긍정적 측면은 강조하고 결점은 핑계를 대서 멀리 치워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자아상이 지나치게 현실과 동떨어지면 남들이 우리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은 어떻게든 우리가 그 차이를 인지하게 만들테고 그렇게되면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적정선에서 조정이 이뤄진다면 결국 우리 손에는 내가 사랑할 수 있고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자아가 생긴다.
그때부터 우리의 에너지는 내부를 향한다. 내 관심의 중심은 내가 된다. 누구나 반드시 겪게 되는 나는 혼자라거나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순간이 왔을 때 우리는 바로 이 자아에게 돌아가나 자신을 달랠 수 있다.
확신이 서지 않고 기분이 우울할 때 자기애는 우리를 일으켜 세워서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며 심지어 남보다 우월하다고 느끼게 만들어준다.
자아상은 마치 보일러의 온도조절 장치처럼 의심과 불안을 조절하도록 도와준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관심과 인정을 받기 위해 남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는 ‘자존감’이 있다.
그 온도조절장치가 작동하는 과정은 우리 눈에 보이거나 느껴지지 않는다. 그 작동 원리를 머릿속으로 가장 잘 그려보는 방법은 오히려 통일된 자아상이 없는 사람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심한 자기 도취자들’ 말이다.
내가 의지하고 사랑할 수 있는 자아를 형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순간은 두 살과 다섯 살 사이에 찾아온다. 우리는 어머니와 서서히 분리되면서 즉각적 만족을 얻을수 없는 세상과 마주친다. 또한 나라는 사람은 혼자이며 생존을 위해 부모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에 대한 우리의 대처법은 부모가 가진 최상의 자질, 즉 강인함과 우리를 달래줄 능력등 여러 측면을 자신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독립된 인간이 되기 위한 최초의 노력인 셈이다.
우리의 이런 노력을 부모가 격려해준다면, 그리고 스스로 강인함을 느껴야 하고 개성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부모가 인정한다면, 우리의 자아상은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차츰 성장할 수 있다. 그런데 심한 자기도취자들은 이런 초기 발달 과정에서 뚜렷한 단절을 경험한다. 그래서 일관되고 현실성있는 자아에 대한 느낌을 한번도 제대로 구성해 보지 못한다.
심한 자기도취자들은 그의 어머니 혹은 아버지도 심한 자기도취자일 수 있다. 지나치게 자기 안에 침잠해 자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어린자녀가 독립성을 키우려는 노력을 격려하지 못했을 수 있다. 아니면 정반대로 사람을 옭아매는 유형의 부모일 수도 있다.
자녀의 삶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숨막힐 정도의 관심을 퍼붓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녀를 고립시켰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자녀의 발전을 부모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수단으로 생각하며 살수도 있다.
그런 부모는 자녀에게 자아를 정립할 공간을 내주지 않는다. 심한 자기도취자들을 잘 살펴보면 거의 언제나 방치되거나 옥죄인 경험이 있다. 그 결과 이들은 돌아갈 자아도 자존감의 토대도 없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끼려면 전적으로 타인이 주는 관심에 의존해야 한다.
심한 자기도취자가 어린시절 외향적 성격이라면 그런대로 잘 지낼 수 있다. 어쩌면 아주 잘나가는 유년기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주목을 끌고 관심을 독점하는 데 달인이 되고 겉으로는 쾌활하며 활달해 보일 수도 있다. 아이에게 이런 모습이 보이면 어른들은 아이가 나중에 사회적으로 성공할 징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표면 아래를 들여다보면 이들은 자신이 가치있고 온전한 사람이라고 느끼기 위해 ‘관심’이라는 버튼을 계속 눌러보며 위험할 만치 거기에 중독되고 있다. 만약 심한 자기도취자가 내향적 성격이라면 그들은 판타지에 귀의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상상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비현실적인 자아상을 남들은 인정해주지 않을테니 심한 의구심과 자기혐오를 느끼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신(神)이 아니면 벌레가 될 것이다. 일관된 중심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상상 속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래서 계속 새로운 인격을 시도할 것이며 그에 따라 판타지는 계속 바뀔 것이다.
심한 자기도취자들의 악몽이 펼쳐지는 것은 보통 2, 30대가 됐을 때다. 이들은 그때까지도 아직 내면의 온도조절장치, 즉 자신이 사랑하고 의지할 단단한 자아의 개념을 형성하지 못했다. 외향적 유형은 살아 있다고 느끼고 인정 받으려면 끊임없이 관심을 끌어야 한다. 그들은 더 극적이 되고 과시적이며 과대망상적이 된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게 지겹고 한심할 수도 있다.
이들은 계속 새로운 관객이 필요하기 때문에 친구와 장소를 옮겨 다녀야 한다.
한편 내성적 유형의 심한 자기도취자들은 판타지 속 자아에 더 깊이 빠져든다.
사회생활에 서툴면서도 본인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게 남들 눈에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과 소원해지고 점점 더 위험하게 고립되는 경향이 있다.
어느 유형이 되었든 틀림없이 찾아올 자기 회의나 우울의 순간에는 자신을 달해야 하기 때문에 술이나 약물 기타 각종 중독 없이는 버티기 힘들 수도 있다.
심한 자기도취자들을 알아볼 수 있는 행동 패턴이 있다. 그들은 모욕을 당하거나 누가 도전해올 경우 방어책이 없다.
내면에서 그들을 달래주거나 그들의 가치를 인증해 줄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청난 분노의 반응을 보이고 복수심에 불타며, 자신은 죽어도 옳다고 생각한다. 그것말고는 자신의 불안을 누그러뜨릴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터지면 그들은 자신을 상처입은 희생자 취급해서 남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심지어 동정심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들은 까칠하며 예민하다. 작은 꼬투리라도 하나 있으면 모두 본인에 대한 공격으로 생각한다. 피해망상적이 되고 사방을 적으로 간주한다. 어떤 식으로든 본인과 직접적으로 관계없는 이야기를 꺼내면 시큰둥하거나 참기 힘들다는 표정을 짓는다. 대화의 주제는 즉각 다시 그들에게로 돌아가고 숨은 불안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다른 일화나 사건같은 이야기를 꺼낸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