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뒤에 숨은 실체를 꿰뚫는다
사흘 후 에릭슨은 의식을 되찾았다. 어떻게 된 노릇인지 죽음은 그를 비껴 갔다. 그러나 마비증세는 이제 온몸으로 확대돼서 입술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움직일 수도 손짓을 할 수도 없고 그 어떤 식으로도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할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눈동자여서 그의 좁은 방안을 둘러볼 수 있었다. 이제 에릭슨은 자신이 자란 위스콘신 주 시골의 어느 농가에 갇혀 지내게 됐다. 그에게 유일한 말벗은 일곱 명의 누이와 형제 하나. 부모님, 개인 간호사 한 명이 전부였다.
그토록 활발한 성격의 에릭슨에게 지루함은 고문과도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누이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던 에릭슨은 전에 몰랐던 사실 하나를 알게 됐다. 누이들이 대화를 나눌 때면 얼굴에 온갖 움직임이 생길 뿐만 아니라 목소리톤도 그 자체로 마치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바뀐다는 점이었다.
누이가 입으로는 “응. 좋은 생각이네”라고 말했지만, 목소리가 밋밋하고 히죽 웃는 것 등을 종합해보면 ‘사실 내 생각에는 전혀 좋은 것 같지 않아’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찌된 노릇인지 ‘응’이 실제로는 ‘아니’를 뜻할 수도 있었다. 이때부터 에릭슨은 그런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극적인 하나의 게임 같았다. 다음 날 하루 동안 에릭슨은 정도도 다르고 수반되는 표정도 모두 다른 16종의 ‘아니’를 발견했다. 심지어 누이 중 하나는 ‘응’이라고 말하는 동안 고개를 가 로젓기까지 했다. 아주 미묘했지만 에릭슨의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사람들이 입으로는 ‘응’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아니’라고 느낄 때는 찡그린 표정이나 보디랭귀지에서 그 본심이 드러나는 듯했다. 한번은 누이 하나가 다른 누이에 게 사과를 먹으라고 권하는데 긴장된 표정과 경직된 팔 동작을 보니 그건 그냥 예의 상 하는 말이었고 실제로는 본인이 먹고 싶어 하는 눈치가 뚜렷했던 적도 있었다.
다 른 누이는 그 신호를 알아채지 못했지만 에릭슨의 눈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 대화에 낄 수 없었던 에릭슨은 사람들의 손동작과 눈썹이 올라가는 모습. 목소리 의 높낮이, 갑자기 팔짱을 끼는 모습등을 관찰하는 일에 흠뻑 빠져 들었다.
심지어 에릭슨은 누이들이 자기 옆에 오면 목의 핏줄이 더 자주 팔딱이게 된다는 것까지 알게 됐다. 누이들이 초조해 한다는 신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