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1862~1918)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1862~1918)
초기 분리파 운동에 참여했던 클림트는 오스트리아의 ‘빈분리파’ 운동의 정점에서 상징주의적 표현주의 회화를 이끌었던 화가이다. 특유의 황금빛의 화려한 화면으로 매혹적인 장식적 작품이 특징적인 클림트는 낡은 전통과 새로운 도전이 혼재된 전환기 시기의 대표적인 모더니즘의 선구로 평가된다.
극빈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클림트는 뛰어난 재능으로 일찍이 스물한 살이 되던 해부터 화가로서의 명성이 시작됐다. 특히 서른 살이 될 무렵부터 상징주의적인 요소를 보여 주면서 강렬한 표현주의 화가로 자리매김했다.
이 시절 그의 작품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며, 구상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동일한 화면에 환상적 요소와 평면적인 면이 동시에 혼재된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1897년 형성된 ‘빈 분리파’의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국제적인 평판을 얻으며 화가로의 명성을 떨친다. 유난히 많은 여성을 등장시키는 클림트에게 여성의 의미는 ‘요부’인 동시에 ‘어머니’라는 대조적인 상징성을 부여한다. 이는 클림트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었던 어머니에 대한 고착 현상과 여성을 통한 시대정신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클림트는 외설과 퇴폐적인 요소로 당대의 전통 화단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특히 빈 대학의 천장화가 많은 논란이 되었지만, 그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을 확립하고 있다.
# 법학 (Philosophy), 의학 (Medicine)
1894년 교육비의 의뢰로 제작된 빈 대학 강당의 그림은 「신학」 「철학」 「의학」, 「법학」등 4개의 테마로 이루어진 천장벽화이다. 이 중 「신학」을 제외한 3개의 주제를 제작한 클림트는 벽화가 제작되자마자 끊이지 않는 비난에 시달렸다.
최초 「철학」이라는 작품이 공개되었을 때 클림트에 대한 동조자와 반대자들의 논쟁은 매우 격렬하게 이루어졌다. 전통주의적이었던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곳곳에 등장하는 뒤엉킨 나체의 인물들은 커다란 충격이었고, 이성의 위대한 힘을 역설적으로 의도했던 클림트의 이 그림은 곧 추악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뒤이은 「의학」에서도 에로틱한 복수의 여신의 표현으로 비난이 이어졌다. 시리즈중 마지막 작품인 「법학」을 통해서도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남자의 사실적인 묘사로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묘사된 음산한 분위기라는 또 다른 비난을 끌어들였다. 클림트를 비롯한 분리파 화가들의 가장 큰 특징은 풍부한 장식성에 있다.
황금색의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구성, 클림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 같은 장식성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클림트가 미술교육을 받았던 응용미술학교의 자연스러운 영향도 있었지만, 이는 당시 유행하던 미술사조인 아르누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장식성을 추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클림트는 상징주의적인 요소를 배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에서 강력한 창조적인 힘이 넘치는 표현주의적 그림을 탄생시키고 있다.
# 키스 (Kiss)
클림트의 아방가르드의 탄생을 상징하는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이 작품은 사실적이면서도 장식성이 돋보이는 작품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얼굴은 사실적이면서 섬세하게 표현되었으면서도그 밖의 부분은 평면적이며 복잡한 무늬 조합을 조화롭게 결합함으로써 독특한 회화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1907~1908년 크림트의 화력의 정점을 이루는 시기에 제작된 유명한 작품으로, 전시되자마자 오스트리아 정부가 사들일 정도로 처음부터 호평을 받았다. 특히 클림트 특유의 개성적인 에로티시즘의 여성상이 잘 반영된 이 작품은 클림트가 평소 관심이 많았던 남근 모양의 실루엣 속에 연인의 이미지를 담아내고 있다.
즉, 한몸으로 묶여 나타낸 남근 형상은 여성의 몸과 남근 사이에서 찾을 수 있는 형태적 유사성에서 비롯된 그의 흥미가 반영된 듯하다. 평소 자화상은 물론 그림에 대한 단편 글조차 남기지 않기로 유명한 그였지만, 자신의 캐리커처를 남근 모양으로 스케치했다는 사실에서 클림트는 에로틱에 집착한 '여성의 화가'였음을 보여 주는 듯하다.
이 작품 「키스」는 금색 물감을 사용하였던 황금양식 시기(1907~1908)의 절정에 그려졌는데, 이 작품을 끝으로 더 이상 클림트는 자신의 그림에 금색 물감의 화려함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이후의 그림들에서는 보다 장식적인 강렬하고 다채로운 색채 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 자신은 이런 변화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당시의 프랑 스의 야수파, 독일의 표현과 등 색채가 형식을 압도하게 된 현대회화의 영향을 보여 주고 있다.
# 유디트 (Udith1)
구약 성경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개성적인 에로티시즘의 여성상을 표현한 그림으로, 사실적이면서도 장식성이 돋보이는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성서 속의 유디트는 파격적인 여성의 존재로, 능동적이고 독자적으로 정치적 사건에 개입하여 남성중의 남성이라 할 수 있는 강한 장군을 정복하고 죽인 여자라는 점에서 당시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림트는 이런 유디트의 전복성을 성적인 의미로만 한정 짓고 단순화했다. 유디트는 남자의 목 혹은 그 목이 상징하고 있는 성기를 자르는 가학적인 이미지에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오직 쾌락뿐이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드러낸다.
19세기 말, 대다수 예술가들을 미치게 만들었던 팜므파탈로 새롭게 태어난 작품 속 유디트는 분명 클림트가 생각하는 ‘여성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8년 뒤인 1909년 「유디트 Ⅱ」와 나란히 유디트를 주제로 그린 클림트의 팜므파탈 시리즈를 특징짓는 대표적인 회화작품 중 하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