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주의미술은 현대 표현주의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와 함께, 상징주의 화가인 클림트, 에곤 쉴레 등의 분리파 작가들과 '다리파'와 '청기사파'를 중심으로 한 독일 표현주의 작가들로 묶이는 다음의 세 그룹으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분리파 그룹을 살펴볼 수 있다. '분리파' 그룹은 처음 베를린에서 바르덴이 창간한 예술잡지 「슈투름 및 같은 이름의 화랑에 의해 만들어진 '슈투름 그룹'으로 시작하였으며, 1897년 클림트를 회장으로 하는 '빈 분리파'로 탄생하게 됐다.
과거의 전통에서 분리되어 자유로운 표현활동을 목표로 한 이들은 미술과 삶의 상호 교류를 추구하였다. 인상파와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아 현대 건축과 공예의 영역에서 성과를 보였으며, 오스트리아의 화가 클림트와 그의 제자인 에곤 쉴레, 코코슈카 등으로 이어져 독특한 상징주의적 표현주의를 전개시키고 있다.
둘째는, 1905년 드레스덴에서 키르히너, 레벨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다리파' 그룹으로 독일 현대회화의 출발점을 이루었고 프랑스의 '야수파'와 북유럽의 뭉크에 고취되었다. 그 중심인물은 원시미술에서 생명력을 얻어내고, 격앙된 색채와 예리한 관찰로써 대도시의 거리풍경을 그린 키르히너이다. 주로 사회비판적 입장에서 예술을 전개하였던 점이 특징인 '다리파'는 한때 잠시 동안 에밀 놀데가 참여하기도 했다.
셋째는, 칸딘스키, 마르크를 중심으로 1911년 뮌헨의 신예술가동맹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결성한 청기사 그룹이다. 청기사 그룹은 표현주의를 기초로 하면서 색채의 상징적의미를 강조했다. 구성원으로는 이 밖에도 클레, 뮌터 등이 있고, 전람회는 뒤에 드레스덴의 '다리파', 베를린의 '분리파 협회‘, 루소, 피카소, 브라크, 러시아 작가인 말레비치 등이 참여하기도 했다. 특히 표현주의 작가이자 이론가인 간딘스키는 화가의 내적필연에서 우러나오는 정신성·환상성의 중요성을 주장하고, 후에 추상회화의 선구자로 활동하게 된다.
초기 표현주의 (분리파, Sezession, 1892~1910)
분리파는 19세기 말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적 그룹으로 기존의 예술가협회 등의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단체에 반발하여 새롭게 조직하면서 태동한 혁신적 예술그룹이다. 과거의 전통에서 분리되어 자유로운 표현활동을 목표로 하였으며, 미술과 삶의 상호 교류를 중요시했다.
이들은 고루한 사상을 답습하지 않는 작품의 제작으로 예술 경향과 국적을 초월하여 전위미술에도 관대하게 문호를 개방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특히 이탈리아의 미래파, 초기의 프랑스의 입체파 등에도 문호를 개방하여 참여시키며 최대의 국제전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분리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 'Secedo'를 어원으로 하는 이 명칭은 아카데미즘이나 관주도의 전시회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과거의 전통에서 분리되어 자유로운 표현활동을 목표로 했으며, 그 목적은 미술과 삶의 상호교류를 추구하고 고루한 사상을 답습하지 않는 작품의 제작이었다.
최초의 분리파는 1892년에 뮌헨에서 시작되었으며, 1897년 클림트(Gustae Kimt)를 회장으로 하는 비엔나 분리파가 탄생하였다. 이후 1899년에는 뭉크의 작품에 대한 베를린미술협회의 전시 거부를 계기로 리버만의 지도하에 베를린 분리파가 창설되었다. 이후 베를린 분리파는 눈태와 페슈타인 등 표현주의 화가의 출품 거부가 원인이 되어 1910년 재분열된 후 드레스덴의 다리파와 뮌헨 신미술가협회의 화가들이 참가하면서 표현주의적 성격이 더욱 짙어진다.
당초 인상주의와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은 회화운동으로서 출발한 분리파는 오히려 미술이외의 영역에서 두드러진 성과가 나타나는데, 영국의 미술과 공예운동, 독일의 유겐트슈틸 등과 더불어 근대 공예와 건축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대표작가로는 뭉크, 클림트, 리버만 등이 초기에 활동했으며, 이후 코코슈카, 에곤 쉴레 등이 뒤를 따랐다.
다리파 (Die Brucke, 1905~1913)
'다리파'는 1905년 드레스덴 지역의 건축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급진적인 미술사조로 당시 독일 내의 음울하고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비판과 대상의 내적 표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독일 표현주의의 대표적인 화파이다. 당시 키르히너, 헤켈 등 4명이 주축이 되었던 다리파는 혁명적인 정신과 회화, 구예술과 신예술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고자 하는 의도로 출발하여, 기존의 아카데믹화된 분리파에 대항하여 내적 자아를 직접 표출하려고 시도하였다.
'다리파'의 표현적 특징이기도 한 데포르마시옹과 원색은 프랑스의 '야수파'에 대응되는데, '야수파'가 주로 조형의 맥락에서 접근하였던 데 반해 다리파의 경우는 북방적 감성을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고흐, 고갱, 뭉크에 심취하였던 그들은 흑인 조각에 끌리어 그 열광과 불안을 회화, 목조, 목판화, 석판화, 에칭, 포스터 등의 다양한 조형 수단을 구사하여 형상화했다. 공동체 생활을 동경하여 공동 전시와 공동 작업을 하였던 '다리파' 작가들은 주로 도심 속 풍경을 강렬한 색채, 동요하는 형태 왜곡 등을 자유롭게 나타냄으로써, 개인, 종교, 성, 군중사회 속의 심리적 압박감을 표현하였다. 이들은 회화의 목적을 단순한 자연의 재현으로 보았던 르네상스이후 유럽 미술의 전통적인 규범을 떨쳐버리고 감정과 감각의 직접적인 표현에 두었다.
따라서 균형과 질서의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전통적인 개념을 무시하고 이에 따라 선이나 형태, 색채 등은 이같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사용된 수단이었다. 오직 감정의 강렬한 전달과 왜곡을 통한 주제와 내용의 강조를 추구했다.
그러나 이후 전문 화가집단으로 활동하였던 '청기사파'와 달리 아마추어 작가들로 이루어진 '다리파'는 양식적 특성의 발전이 표현주의의 정신적 태도와 이념에 따르지 못하면서 퇴색하게 된다.
결국 1913년에 다리파 미술은 작가들 간에 이루어진 내부의 불화로 해체되고, 작가들은 각기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됐다. 하지만 다리파의 운동은 표현주의 운동의 선구로서 젊은 세대의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