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1903년 캔버스에 유채, 196.5cm/128.5cm 클리블랜드미술관
「인생」 1903년 캔버스에 유채, 196.5cm/128.5cm 클리블랜드미술관

후기 입체파인 1912년 입체파는 분석에 의해 획득된 추상적 구조와 실제의 형태를 결합하여 새로운 그림을 만들어 냄으로써 종합적 입체파를 형성하게 된다. 이 시기는 하나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그 속에 분석적 입체주의를 절충시킨 것이며 여기서 기존의 작은 분석적인 면들은 사라지고 보다 큰 기하학적 형태를 구축하게 된다. 이것은 분석적 입체파가 자연히 화면구성에만 치중하여 해체된 면으로만 대상을 파악함으로써 물체가 지닌 리얼리티의 이미지가 사라지는 위기를 인식함에 따른 것이다.

이에 따라 종합적 입체파에서는 분석적 입체파 후기에 시도되었던 즉물적인 신문지나 벽지, 담배갑이나 트럼프등을 화면에 붙여 가는 콜라주와 파피에 콜레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이를 통해 사물의 풍부한 색채를 부활시키고, 기하학적인 색면과 대상의 환기력 있는 요소가 융합하게 함으로써 대상의 이미지를 회복시키고자 하였다.

1912년 브라크에 의하여 사용된 파피에 콜레는 분석적 입체파가 너무 분석에 치우침으로써 놓쳐버린 사물의 특성과 감정의 보강을 위한 대안이었다. 즉, 이것은 피카소가 말한 “입체파의 눈과 마음이 자각한 것을 표현하는 수단”의 활용으로, 종이나 벽지, 나무무늬 등을 붙여 애초에 그리려 했던 사물의 특성과 감정을 회복시키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기법은 입체파 그림이 여전히 파악되기 어렵기는 하였지만 어느 정도 분석적 입체파 그림에서 구성적이고 종합적인 접근방식의 ‘종합적 입체파’라는 새로운 양식으로의 변화를 이끌어내게 하였다. 콜라주의 파피에 콜레는 뒤따르는 다다와 후대 미술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어 다다의 콜라주와 포토몽타주, 초현실주의의 프로타주 등 여러 기법들로 이어지고 있다.

* 파피에 콜레와 콜라주

파피에 콜레는 '종이를 덧붙이다'라는 의미의 기법들로 1912년경 입체주의 화가를 대표하는 브라크가 최초로 시도하였던 방식이다. 입체파가 너무 분석에 치우쳐 사물의 특성과 감정이 사라진 데에 대한 보완으로 그려진 부분들에 대한 보충으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유화로 그린 작품의 일부분에 신문지나 악보 같은 종이 인쇄물을 붙여 작품을 제작했다. 이는 ‘입체파의 눈과 마음이 지각한 것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즉물적인 신문지나 벽지, 담배갑이나 트럼프, 또한 나무무늬 등을 붙여 애초에 그리려 했던 사물의 실재감을 조금이나마 찾으려한 데서 기인한 종합적 입체파 미술의 주된 기법이 되었다.

보통 '파피에 콜레'와 '콜라주'라는 용어가 서로 간에 구분 없이 사용되었으나 다소 개념적 차이를 지닌다. 파피에 콜레는 보다 구체적인 형상을 만들어 내기 위해 다소 일관성이 있고 고전적인 디자인과 더불어 종이를 중심으로 하는 재료의 통일성이 요구된다. 반면에 콜라주는 재료가 다양해도 되고 형태나 꾸밈새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로운 면을 지닌다.

1915년 이후 입체파 작가들로부터 멀어진 이 기법은 이후 예술가들에 의해 새롭게 탄생되고 있는데, 다다작가들과 초현실주의에 속하는 막스 에른스트, 그리고 말년의 마티스 작품에서도 다양한 양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대표적인 입체파 작가와 작품

추상 미술의 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입체파 미술은 화면과 사물의 공간감과 입체감의 구조적 파악과 표현에 중점을 두었던 화파이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피카소 (Pablo Picasso, 1881~1973)와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 등이 있으며, 이 외에 후기 입체파기의 화가로 분류되는 화면에 밝은 색채와 다이내믹한 율동을 도입했던 F. 레제와 R. 들로네 등이 있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모두 현실의 대상과 다른 입체적 회화 공간을 표현함으로써 회화의 독자성을 획득하고 있으며, 화면에서 입체적 형태를 표현하기 위하여 제한된 색채와 환원적 기하학적 형태를 적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화가는 거의 모든 면에서 대극을 이루는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피카소는 자신의 감정을 격정적으로 숨김없이 표현하고 작품을 즉흥적이고 빠르게 그려나간 반면, 브라크는 좀 더 소극적이지만 성숙된 표현을 기나긴 기간 동안에 신중하고 완벽하게 제작하려 하였다. 또한 피카소가 대상에 대해 직관적인 표현으로 접근하고 있는 데 반해, 브라크는 명석한 논리를 바탕으로 접근하여 각기 독자적인 스타일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서로 경쟁자이면서도 협력자이기도 하였던 이들은, 1912년 브라크가 자신의 그림에 색종이 등의 '파피에 콜레'를 시작하자 피카소도 곧 따라서 신문, 포장지, 명암, 봉투 등을 오려 붙였고 그러한 작업들로 그림 속에 현실 자체를 도입하려고 시도하였다. 또한 브라크가 바이올린을 도입했을 때도 피카소는 스페인 특유의 기질로 기타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1차 세계대전 전까지 그들은 이런 관계로 서로의 그림이 많은 영향을 주면서 입체파의 세계를 구축해 갔다.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1881~1973)

“나는 사물을 본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대로 그린다.”라고 주장했던 피카소는 스페인에서 태어나 주로 프랑스에서 브라크와 함께 입체파 화가로 활동했던 20세기의 대표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어린 시절 시골 미술학교 교사 출신의 부친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바르셀로나의 미술학교에서 미술에 입문하게 되었으며 이후 19세 때 파리에 정착하며 국제적인 작가로 자리 잡았다. 이후 후기인상파 작가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그는 페니키아와 이집트 미술, 아프리카 흑인 조각예술에서도 깊은 영감을 받게 된다.

다양한 작품을 시도했던 피카소는 입체주의 이전에 아르누보, 상징주의, 청색시대, 장밋빛 시대를 거쳐 1907년 「아비뇽의 여인들」을 통해 과거 전통적 회화에서 벗어나 복잡한 3차원적 공간과 모방적인 형태를 포기하고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 축소된 배경 공간 등의 그림을 창출했다.

색채(청색, 황색)를 제한하며 “무엇을 그리느냐가 아닌 어떻게 그리느냐”하는 문제에 집중하여, 그림의 주제 이전에 형(form)에 대한 조형적인 혁신을 추구하였다.

또한 색채 역시 제한하여 형태표현을 강조하였다. 이 시기의 그림들은 입방체와 기하학적 형태가 눈에 띄며 화면의 공간은 깊지도 넓지도 않다. 종합 큐비즘기는 브라크와 함께 ‘콜라주’의 적극적인 시도를 보여 주었다.

고전주의 시기의 작품인 「세악사(1921)」는 회고적이자 큐비즘을 결합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이후 「우물가의 세 여인(1921)」은 리얼리즘과 클래시시즘, 전통으로의 회귀가 나타난 작품이다. 「게르니카(1937)」에서 피카소는 “회화는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관여될 수 있는 하나의 공격적인 것”으로 주장하기도 하였다.

92세의 긴 생애 동안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였던 그는 거의 2만 점에 달하는 작품과 함께 “진실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있다.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명성을 얻었던 피카소는 대표작으로 「아비뇽의 여인들」, 「게르니카」 등이 있다.

청색시대 (1901~1904)-쓸쓸하고 차가운 청색조의 시기

「인생 (Life)」

이 그림은 초기 파리에 정작한 후 제작된 최초의 독창적 스타일인 청색기의 작품으로, 어려운 시기로 풍운의 꿈을 안고 파리에 동행했던 절친한 친구 카사혜마스의 자살에 대한 충격을 담아내고 있다. 이 시기는 가시적 리얼리티 대한 관찰보다 정신적 가치를 더 중요시한 사실로서 “내가 푸른색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은 죽은 카사헤마스를 생각하면서부터이다.”라고 밝힌 피카소의 회고에서처럼 청색의 사용과 친구의 죽음을 연관해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청색시대’란 명칭은 피카소가 청색 계통의 인디고와 코발트 블루를 즐겨 사용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그의 파리 정착 초기의 어려운 시기를 통해 얻어진 양식이다.

청색은 차가운 색조로 당시 어렵고 가난했던 파리 이주생활 동안의 고통스러움을 반영한 것이다. 뒤 배경에서 위의 그림은 고갱풍이고, 아래쪽 웅크린 여인은 고흐풍으로 그려졌음에서 그의 후기인상파의 영향을 보여 준다. 인물들의 형상은 스페인 특유의 엘 고레코풍의 길쭉하고 창백한 모습으로 우울함을 더해주고 있다. 그의 청색시대의 중요한 모티브인 부성애와 청춘의 격렬한 사랑의 표시를 표출시켜 ‘인생 축도’의 한 단면을 보인 또 하나의 걸작이다.

이 시기 그가 정착한 몽마르트의 빈민지역은 가난한 무명 예술가, 건달, 노동자들의 거주지로, 이 시기의 그의 그림들은 연료가 없어서 자신의 그림을 태워 몸을 녹여야 했던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우울한 감정을 투영한 것이었다. 피카소는 이러한 춥고 무질서한 공간속에서 오히려 그의 풍부한 아이디어와 창조력을 키워 새로운 미술의 바탕을 만들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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