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놀데 (Emil Nolde, 1867~1956)
에밀 놀데는 독일 표현주의 화가를 대표하는 화가로 판화와 수채화를 포함하여 격정적인 종교화와 불길한 분위기를 담은 풍경화로 유명하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 는 젊은 시절 목각사(木刻師)로 일하며 생활했다. 정식으로 미술공부를 할 수 있었던 때는 그 초기작품 중 몇 점이 엽서로 제작되어 팔렸을 때 뿐이었다. 파리에서 표현주의 화풍과 유사한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던 그는 1906년 ‘다리파’에서 약 1년간을 보냈으나, 지나친 결속을 강조한 그룹의 통제에서 탈퇴하고 독자적인 표현주의 화풍을 발전시켰다.
초기 자신이 지지했던 나치가 이후 정권을 잡은 후 자신의 작품이 ‘퇴폐적’으로 규정되어 작품활동이 중단되는 불운을 주기도 하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이전 주제를 반복하는 데 그쳤다.
「최후의 만찬」은 종교화가로 유명한 자신의 독실한 기독교적 신앙이 반영된 작품으로, 특유의 격정적인 터치와 원색이 두드러진다. 이 작품에서 예수는 성배를 두 손에 꼭 쥐고 자신의 몸과 피를 한 구원을 약속하고 있는 숙연한 장면이다. 비스듬하게 감은 눈과 우수에 찬 듯한 얼굴표정은 예수의 비장하고 굳건한 결의를 나타내고 있다.
화면의 중심에 위치한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제자들은 누가 스승을 배반할 것인지 서로 의심하며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주는 몸과 피를 받아먹을 동지로서 서로 서로 어깨에 손을 얹고 유대감과 동료애를 끈끈하게 교환하고 있다.
관람자 역시 드라마틱한 이 사건에 동참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다시 말해 화면 전경의 예수와 마주 앉아 등을 보이고 있는 제자들의 위치에 우리도 함께 앉아 예수의 구원의 약속을 듣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화면에서 주목되는 거칠고 투박한 예수의 손과 함께 제자들의 허름한 옷차림, 서로 부대 끼며 앉아 있는 듯한 매우 협소한 장소 등은 가난과 초라함을 통해 세속적이지 않은 소박함과 함께 극적인 종교적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성배를 감싸 안고 있는 크고 투박한 손에서 놀데가 지닌 깊은 신앙심을 살펴볼 수 있다.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1866~1944)
러시아 모스크바 태생의 화가로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청기사파의 리더로 활동했다. 사실적인 형체를 버리고 순수 추상화의 탄생이라는 미술사의 혁명을 이루어냈던칸딘스키는 미술의 정신적인 가치와 색채에 대한 탐구로 20세기 가장 중요한 예술이론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초기 유망한 법률학자로 활동하였으나, 1895년 모스크바에서 이루어진 인상파전 에 참여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그림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미술을 시작하게 되었다. 초기에 화려한 색채의 풍경화나 러시아 민속화에서 영감을 받았던 그는 점차 구상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대상과 상관없이 형태와 색채, 선들 속에서 표현 가능성을 확장하였다. 이후 음악과 철학, 근대미술과 추상작업에 대한 사상들에 관심을 기울였던 그는 자유로운 필치의 색과 선으로 구성된 추상화를 제작하게 된다.
칸딘스키는 1911년 뮌헨에서 프란츠 마르크 (Franz Marc),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 와 함께 아방가르드 모임인 ‘청기사파’를 결성하며, 표현주의 미술을 전개하였다. 또 다른 표현주의 그룹인 ‘다리파’ 그룹이 현대인의 삶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보다 현실적인 문제를 조명한 반면 그는 정신성이라는 초월적인 가치의 회화적 표현을 추구하였다.
청기사파에서 2년 동안 독일 표현주의 미술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칸딘스키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모스크바로 귀국해 미술학교 교수로 지내며 구성주의를 연구한다. 이후 1921년 독일에 돌아와 1922~1933년 바우하우스가 폐교되기까지 교편을 잡았으나, 1933년 파리로 망명하였다.
순수한 색과 추상적인 형상들로 이루어진 작품들로 추상화를 창조하였던 칸딘스키는 음악의 원리에서 영감받아 선명한 색과 형, 그리고 선과 면 등의 조형요소들만으로 구성된 회화를 발전시켰다. 즉, 사각의 캔버스와 아름다운 조형요소의 어우러짐은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와 같은 감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대상의 구체적인 재현에서 완전히 이탈하여, 선명한 색채와 형, 그리고 선들로 써 교향악적이고도 다이내믹한 추상표현을 관철한 후 기하학적 형태에 의한 구성적 양식으로 들어갔으나 몬드리안과는 또 다른 독자적인 발전의 자취를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는 「푸른산, 「즉흥 시리즈」와 「콤포지션 시리즈」 등이 있다.
프란츠 마르크 (Franz Marc, 1880~1916)
독일 뮌헨 출생의 표현주의 화가로 바실리 칸딘스키와 청기사파를 창립한 회원으로, '청기사' 연감을 공동 집필했다. 후기인상주의, 야수파, 미래파, 입체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다이나믹한 색채감각으로 야수파와 표현주의 양식의 자연 속 인간과 동물을 자연의 우주적인 통합의 주제로 지속적으로 다루었다.
초기 신학공부에 뜻을 두었던 그는 1900년 미술에 입문한 후 1903년 이후 인상파와 후기인상파 작가들의 그림을 접하며 자연에 대한 관심을 담아낸 그림을 제작하였다. 강렬한 색채를 구사했던 그는 인간의 추함에 비해 오염되지 않은 동물의 순수함에 매료되어 동물을 소재로 즐겨 다루었다.
그의 주제적 관심은 인간과 자연의 우주적인 통합의 주제를 다루었던 범신론적인 통합을 지향하는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였다. 1912년 파리에서 들로네를 만나며 더욱 강렬한 색들의 조회를 선보이게 되었다.
1910년 유사한 취향의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를 만난 후 1911년 바실리 칸딘스키와 함께 신미술가협회를 만들었으며, 이후 칸딘스키와 함께 ‘청기사파’를 결성하면서 큰 예술적 변화를 갖게 된다.
근대의 다양한 미술양식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밝은 색채와 단순한 형식의 개성적 그림이 특징적이다. 특히 빨강, 파랑, 노랑을 활용한 색채의 상징적 의미를 통해 조화와 균형을 창조하고자 하였다.
예를 들어 빨강은 난폭한 물질문명의 색, 파랑은 엄격함과 끈기의 남성의 색, 노량은 부드러움과 관능의 여성의 색 등으로 빨강에 노랑을 더하여 난폭함을 부드러움으로 완화시키며, 빨강에 파랑을 섞어 엄격함을 통해 호전성을 경감시키는 등의 효과를 표현하였다.
1913년 이후 전운 속의 유럽에 대한 실망으로 비관적인 작품을 선보였던 그는 1916년 독일군으로 참전하여 프랑스 전선에서 36세의 나이로 생을 마친다. 주요 작품에는 「말이 있는 풍경」, 「푸른 말Ⅰ」 등이 대표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