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내면을 해독하는 단 하나의 열쇠
페리클레스가 아직 무대에 등장하지 않았던 민주주의 초창기에 아테네 사람들이 선호하는 리더유형은 따로 있었다.
그들은 가슴을 뛰게 만들고 설득력있는 언변에 극적인 상황을 잘 연출하는 리더를 좋아했다. 그런 리더는 전쟁 상황이 되면 위험을 감수하려 했다.
무리를 해서라도 자신이 직접 군사작전을 이끌고 나가 영광과 관심을 독차지하려 했다.
그들은 지주나 군인, 귀족같은 민회의 특정파벌을 대변하며 정치생명을 이어갔고 해당 파벌의 이해관계를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매우 분열적인 정치를 했다. 몇 년마다 새로운 리더가 뜨고 졌지만 아테네 시민들은 별 불만이 없었다. 정치가가 권좌에 오래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시민들은 그를 불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BC 463년경 페리클레스가 등장했다. 이후 아테네 정치는 다시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었다. 페리클레스의 첫 행보는 그야말로 이례적이었다. 알만한 귀족 집안 출신인 그가 당시 성장중이던 도시중하층민의 편에 섰던 것이다.
당시에는 농부, 해군에서 노를 젓는 노꾼, 아테네의 자존심이던 장인 (匠人)등이 중하층민을 구성하고 있었다. 페리클레스는 민회에서 이들의 목소리를 높이고 민주정에서 이들의 권력을 키우는 데 힘썼다.
페리클레스가 이끌 게 된 이 계층은 하나의 작은 파벌이 아니라 아테네 시민대다수였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이렇게 크고 무질서한 집단을 통솔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하지만 페리클레스가 그들의 권력을 키우는 일에 워낙 열정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차츰 이들의 신뢰와 후원을 확보해 나갔다.
영향력이 점차 커지면서 페리클레스는 민회에서 확고한 입지를 굳혔고 아테네 정치를 바꿔나갔다. 그는 아테네가 민주제국을 확장하는 것에 반대했다. 아테네인들이 욕심을 부리다 통제력을 상실할까 걱정한 것이다. 그는 제국을 단결하고 기존의 동맹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전쟁이 벌어져 직접 장군이 되었을 때는 인명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군사작전보다는 책략을 써서 이기려고 했다. 많은 이들의 눈에 페리클레스의 이런 행동은 영웅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이들 정책이 효과를 내기 시작하면서 아테네는 유례없는 번영의 시대에 들어섰다. 더 이상 불필요한 전쟁으로 재정이 바닥날 일도 없었고, 제국은 그 어느 때보다 순조롭게 돌아갔다.
그렇게 점점 쌓여가던 재정으로 페리클레스가 벌인 일이야말로 시민들의 놀람과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는 남는 재정으로 정치적 환심을 사는 대신, 대규모 공공건축사업을 벌였다. 사원과 극장 콘서트홀을 발주해서 아테네의 모든 장인이 바쁘게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가 선호했던 건축 양식은 개인적 취향을 반영하고 있었는데, 질서 정연하면서도 매우 기하학적이고 거대하면서도 눈으로 보기에 편안했다. 그가 발주했던 가장 큰 프로젝트는 파르테논 신전과 그 안에 들어갈 12미터짜리 아테나 여신상건설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