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시착

 

고요한 원장은 경북에 개원하고 있는 치과의사다. 필명을 사용하고 있는 고요한 원장은 치과의사이자 작가라 할수 있다. 본지는 15회에 걸쳐 고요한 원장이 중국을 오가면서 느꼈던 진료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치과의사로서의 삶과 애환을 통해  잔잔히 그려가는 그의 논조는  공감을 느끼게  할 것이다.(편집자주) 

오늘이 이번 다롄(대련, 大连) 출장의 마지막 날이다. 다롄은 랴오닝을 대표하는 도시다. 앞서 언급한 선양이 행정 주도(主都)이면 다롄은 경제 주도라 하겠다.
다롄은 고구려와 당나라가 오랜기간 패권다툼을 벌였던 랴오동(요동) 지역의 남쪽 끝에 위치한다. 영화와 국사 교과서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안시성, 요동성과 같은 지구에 있다고 보면 되겠다.

이 도시는 보하이완(발해만, 渤海湾)을 알처럼 감싸고 있는 랴오동 반도의 끝자락에 자리해, 산동반도 특히 옌타이(연태, 烟台)와는 손에 닿을 만큼 가깝다. 일찍이 일제가 점령했던 다롄에는 일본기업이 많이 진출해 있다. 일본 러시아 독일 한국 등으로 분포된 외국인 가운데 일본인이 가장 많고, 도시 어디서나 쉽게 일식당과 이자카야를 만날 수 있다.

중국에서는 몇 안 되는 회를 먹을 수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도시 곳곳에는 일본풍의 건물과 거리 들이 남아있고, 도심에는 아직도 노면전차가 종소리를 딸랑이며 지나다닌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감옥과 형장이 있는 곳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뤼순(여순, 旅順)은 다롄시의 하나의 구(區)다.

안정환 선수가 유럽과 아시아 여러 나라를 두루 거친 긴 클럽생활을 마무리 지은 축구의 도시이기도 하다. 차범근 감독 선수시절에 중국국가대표를 지냈다는 다롄스더 축구팀 감독이 내게 상악동과 임플란트 수술을 받기도 했다. 수비수였던 그가 스트라이커 차범근을 막아내는 데 늘 애를 먹었다며 너스레를 떨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오늘은 일정을 마치고 지난(제남, 济南)으로 이동해야 한다. 내일 아침부터 지난 병원의 행사가 시작된다. 지난은 산동성(山东省)의 주도다. 다롄에서 산동으로 가는 가장 좋은 수단은 항공이다. 비행기를 타고 보하이 상공을 날아가는 방법이다. 최단거리로, 산동의 웬만한 도시까지 1시간 이내로 도달할 수 있다.

다음 수단은 육로로 보하이 만을 돌아가는 방법이다. 차량이나 기차를 타고 가는 것이다. 허나 이는 거의 한 바퀴를 삥 둘러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시속 300~350km로 달린다는 중국의 자랑, 고속철(高铁)을 이용하더라도 일고여덟 시간이 소요되어 대체로 하루를 다 잡아먹게 된다. 게다가 이 구간은 야간열차도 마땅치 않다. 한 번에 닿는 열차 편이 없어 중간에 갈아타야 한다.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밤새 잠을 설치게 마련이다. 이동하며 운치와 휴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노리는 야간열차 이용자에게 이 구간은 꽝인 셈이다.

다리를 통해 만을 질러가면 좋겠지만 건설계획만 있지 시행은 아직 요원한 실정이다. 그러니 이 방법도 제외하자. 마지막 교통수단은 배다. 보통 여객선은 우리가 제주도 갈 때처럼 저녁에 출항해 아침에 목적지 항구에 닿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구간에서는 매일 운항하지 않는다. 게다가 지난은 항구도시가 아니라 산동반도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산동의 어느 항 포구에 내리더라도 다시 육로로 여러 시간을 이동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 방법도 이번 여정에서는 탈락이다.

결론적으로 오늘 다롄 지난 여행자에게 항공편은 200m 달리기 결승전의 마이클 존슨처럼 다른 추적자들을 까마득하게 따돌린다. 
다롄 발 지난 행 항공편은 통상 저녁 시간대까지는 운항을 하고 있다. 역방향으로의 운항편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두 도시의 일정을 잡을 때 앞뒤 간격 없이 바로 붙여서 짜기 좋았고, 그렇게 해서 문제가 생긴 적도 없다.

그동안 우리는 직항 항공편을 당연시하며 감사한 줄 모른 채 타고 다닌 것이다. 여느 때처럼 우리는 일정 내내 이동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마지막 날이 돼서야 샤오인이 호들갑을 떤다. 오늘의 지난 행 항공편이 오후 4시 반이 마지막이란다. 설마 해서 나도 운항일정을 확인해보니 아닌 게 아니라 사실이다. 이런! 낭패다. 직항으로 지난에 가려면 세 시에는 병원을 나서야 한다는 얘기다.

보통 외국인 전문가가 오는 행사 마지막 날 오후에는 환자를 많이 잡아놓지 않기는 하지만, 그래도 오후 세 시면 시간이 너무 이르다. 아무리 내가 중국 각지로 기술을 팔러 다니지만 대한민국 민간외교관임을 자임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나를 보고 찾아온 환자를 등질 수 없는 의료인으로서도, 이건 다롄 병원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아니다. 더구나 나는 ‘하루에 얼마’ 하고 기본 몸값을 보장받고 단기로 고용된 용병 신분 아니던가.

샤오인은 아무리 이른 시간이라지만 웬만하면 직항을 타고 가야겠다는 눈치가 역력했지만, 나는 짐짓 다른 교통수단들을 알아보게 했다. 
다행히 방법이 있긴 있다. 베이징이나 톈진까지 비행기로 가서 다시 고속철로 이동하는 방법이다. 다롄 발 베이징 행 항공편은 늦은 밤까지 계속 있고, 톈진(천진, 天津) 행은 6시 반이 마지막이다.

중국의 각 지역을 향해 달리는 고속철의 시발역 베이징난짠(北京南站)은 막차가 일찍 끊긴다. 베이징 행은 정상 퇴근 후에 어떤 항공편을 이용하더라도, 공항에 내려 다시 역까지 가게 되면 막차 시간에 대지 못한다는 얘기다. 수도 베이징을 경유하는 방법도 탈락이다. 톈진은 시간이 조금 빠듯하긴 하지만, 서두르면 고속철 막차 시간에 댈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에서야 기억난 사실인데, 예전에 역방향으로 이동할 때도 한번 이 방법을 이용한 적이 있다. 지난에서 톈진까지 고속철, 다시 톈진에서 다롄은 비행기, 이렇게 말이다.

아마 그때도 지난 발 다롄 행의 마지막 직항편이 소리도 없이 사라져 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참고로 중국에서는 날씨 원인이 아니더라도 항공편이 돌연 취소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마침 예약된 환자도 다 마무리되었고, 우리는 정상적인 퇴근시간에 맞춰 5시 정각에 병원문을 나섰다. 

중국에서 외국인은 철저히 아날로그일 수밖에 없다. 국내선이라도 모바일 체크인이 안 된다. 신분증이 여권뿐인 우리는 자동발권기도 이용할 수 없다. 천상 체크인카운터에서 발권을 받아야 하는데, 탑승시간이 가까워지면 카운터는 보통 대기 줄이 길게 늘어서기 마련이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샤오인은 내 여권을 받아 들고 뛴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샤오인 것까지 두 개의 캐리어를 끌고 공항청사 안으로 뒤따라 들어온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실시간 운항정보부터 확인한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미리 앱으로 확인해둔 정보와 전광판의 정보를 대조해 최종 업데이트된 발권구역을 찾아간다. 샤오인도 이미 나와 같은 과정을 거쳐 거기에 가있다.

나는 그녀가 대기 중인 열과 같은 구역의 다른 열에 줄을 선다. 둘 중 빨리 줄어드는 카운터에서 발권하겠다는 의도에서다. 발권수속이 가시화되면 발권이 더 빠를 한 사람을 남겨두고, 다른 한 사람은 먼저 보안검사대로 이동해 다시 줄을 선다.

탑승권 두 장을 챙긴 자가 뒤따라 합류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중국 내에서 경험한 수많은 출장에서의 시행착오를 통해 몸에 붙은 우리의 공항 루틴들이다. 생존전술이요 야전교범이다.

중국에서는 돌발상황이 워낙 빈번하게 발생하다 보니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특히나 외국인은 몇 수 앞을 내다보며 늘 계산적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멍 때리고 있다가는 자칫 한곳에 갇힌 채 적어도 하루 이틀은 홀랑 날려버리기 일쑤다.  
이런! 오늘 다롄공항의 전광판은 반 이상이 붉은 색이다. 여기가 주식시장이면 쾌재를 불렀겠지만, 공항이나 역에서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즉각 불안해진다. 이 일대의 기상이 안 좋거나, 공항 자체에 문제가 생긴 거다.

공항 문제란 군사 훈련이나 고위층의 공항 사용 등으로 인해 하늘 길과 땅 길을 통제하는 상황을 말한다. 예전 하얼빈(哈尔滨)에서도 시진핑(习近平) 주석이 공항을 이용한다는 이유로 우리는 하얼빈공항 근처에도 못 가고 몇 시간을 차 안에 갇힌 채 도로 위에 있어야 했던 적이 있다. 

젠장! 톈진 행 우리 비행기도 빨간 불이 들어와있다. 날씨 원인으로 두 시간 가량 지연된다는 안내문자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온다. 톈진에 그 시간에 도착하게 되면 지난으로 가는 고속철은 이미 막차까지 물 건너간 뒤다.

다른 방법들도 재삼 간구해 보았지만 하나같이 이미 다 늦었다. 오늘은 하는 수 없이 기다렸다가 이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한다. 톈진에 내려 고속철역 근처 어딘가에서 하루 밤을 묵고 이튿날 첫차를 타고 지난으로 이동하는 수밖에. 열차 운행시간표 상의 첫 차도 아침 9시나 돼야 지난시짠(제남서역, 济南西站)에 도착한다니, 출근하면 10시를 넘길 수밖에 없다.

다롄 퇴근시간을 지켜주다 보니 이젠 지난에 피해를 주는 상황으로 전세가 뒤바뀌어버렸다. 행사 첫날은 보통 아침 8시 좀 넘어서부터 환자예약이 빡빡한데. 조바심으로 마음이 불편스럽기 짝이 없지만, 달리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톈진 상공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륙하고 한 시간이 지나도록 착륙 안내방송이 나오지 않는다. 뭔가 이상하다. 분명 ‘우리 비행기는 이륙 후 45분이면 톈진 공항에 도착한다’라는 기내 방송을 들었는데. 때마침 방송이 나온다. 톈진 공항의 기상악화로 우리 비행기는 가까운 공항 중 기상 상황이 양호한 지난 공항에 일단 착륙한다고 한다. 순간 실망한 승객들로 기내는 어수선해진다. 이게 좋은 상황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일단 ‘야호!’다. 톈진 공항의 기상이 좋아지는 대로 다시 톈진으로 출발하겠다고 한다. 

‘우리 비행기가 톈진 공항에 불어 닥친 갑작스런 악천후로 도저히 착륙할 수가 없었다. 톈진 상공을 여러 차례 선회했을 테고. 그러는 동안에도 기상상황이 좋아지지 않자 일단 어딘가에 착륙을 시켜야 했겠지. 가까운 다른 공항들의 날씨를 알아본 결과, 지난 쪽이 좋았다. 그것도 톈진 주변의 수많은 공항들 가운데 때마침. 지난 하늘이 우리를 허락한 것이다.’

조종실 안에서의 짧지만 긴박했을 순간들이 머리 속으로 퍼뜩 스쳐갔다. 나보다 두 열 앞에 있던 샤오인이 고개만 빼꼼 내서 나를 돌아본다. 나도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고개만 두 번 끄덕였다. 앉은 채로 우리는 두 사람만 알 법한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한 것이다. 막연한 기대감에 피어 오르는 미소는 누가 볼까 꿀꺽 삼켜야 했다. 

지난 공항에 착륙한 후 우리는 승무원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우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그러자 승무원은 기장님께 말씀 드리고 하기 허락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한다. 잠시 후 돌아온 승무원은 우리더러 수하물로 부친 짐은 없는지부터 묻는다. 꼭 이럴 때를 대비해 설정해놓은 건 아니지만 아무튼 우리는 우리의 야전교범대로 당연히 없다고 대꾸했다.  

중국에 와서 31개 도시를 돌았다. 많게는 한 달에 27~8일을 낯선 길 위에 있었다. 그간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우리는 출장 체질로 단련되어 왔고, 우리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변수들을 최소화 해두었다. 캐리어 분명히 실었다고 몇 번을 큰소리치더니 공항에 도착해 차 트렁크를 열어보니 안에 없었던 일. 시간이 촉박했던 우리만 탑승을 했고, 다음 출장지에서 화물로 받아야 했던 일.

두 번째 도시의 출장기간 내내 여행보따리가 도착하지 않은 일. 그러면서 세면도구와 속옷 따 따위 관련해 치러야 했던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들. 세 번째 출장지에서야 겨우 가방을 손에 쥘 수 있었던 일련의 에피소드들. 한 도착지 공항에서 우리 비행기의 모든 수하물이 다 나오고 벨트가 멈추고 난 뒤에도 내 캐리어는 안 나온 황당한 사건. 탑승시간이 긴박해 겨우겨우 수속을 마치고, 내 이름을 부르는 탑승마감 방송을 들으며 뛰고 달려 가까스로 타고 왔는데, 알고 보니 승객만 타고 수하물은 실리지 않은 거였던 일. 이튿날에야 도착한 짐을 하는 수 없이 받으러 나간 일. 고맙다고 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몰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던 상황.

또 한번은 수하물이 다른 비행기에 실린 일. 기내반입 물품에 대한 세부규정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때라 공항마다 해석이 분분했고, 실랑이하다 결국 연결 항공편을 놓치고 만 일. 이렇듯 길 위에서만 해도 나의 중국에는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이후로는 정말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면 짐을 절대 수하물로 부치지 않는다. 여행용 캐리어도 정확한 표준규격의 기내용만 사용하고, 기내반입이 금지된 물품은 출장기간 동안 아예 쓰지 않는다. 보안검사 X-레이 상에 비슷하게라도 나올 만한 것이 없는지 매번 꼼꼼히 체크한다. 액체류도 공연히 꺼내야 하는 번거로운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반입 제한량에 훨씬 못 미치는 제품을 산다. 그게 불가능할 시엔 작은 용기를 준비해 조금씩 덜어가지고 다닌다.

좌석을 받을 때도 착륙 후 잽싸게 내려 연결 항공편이나 다른 교통편을 이용하기 쉽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따라서 가능한 한 앞쪽 열의 통로 자리로 받는다. 샤오인과 꼭 같은 열에 앉을 필요는 없다. 기내선반에 짐을 둘 때는 내 자리에 섰을 때 손에 닿는 위치에 올려놓는다.

가능하면 내 좌석 바로 위에 놓고, 피치 못해 뒤쪽이면 팔이 자라지 않는 거리는 절대로 피한다. 가까운 곳에 놓을 만한 공간이 없다면 내 자리와 앞쪽 출입구 사이의 선반 어딘가에 둔다.  

승무원은 톈진 공항의 기상상황을 봐야 한단다. 기상이 조속히 좋아지지 않아 우리 비행기가 다시 이륙하기까지의 대기시간이 길어진다면 내려드릴 수도 있다고 한다. 나는 톈진의 날씨가 좋아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이미 지난 땅에 왔는데, 어찌 다시 톈진으로 날아갔다가, 어딘가에서 쪽잠을 자고, 아침에 또다시 돌아와야 한단 말인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때는 그게 우리만 좋자고 백여 명에 달하는 탑승객, 밤늦도록 그들을 기다릴 더 많은 수의 가족과 지인 들, 그리고 승무원과 공항 관계자 모두에게 피해가 가는 나르키소스적 사고라는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창을 통해 지상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항공 유를 보충하는 급유차도 다녀간다. 30분이 지날 무렵 탑승구와 비행기를 연결하는 브리지가 우리 쪽으로 미끄러져오는 게 눈에 들어온다. 낙관적인 신호다. 드디어 항공기 문이 열린다. 마침내 우리 두 사람은 지난 땅을 밟았다.

밤이 깊었지만 당일에 도착했다. 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간에 최종 목적지까지 도달한 것이다. 없는 직항을 타고서 말이다. 발바닥에 무슨 용수철이라도 단 것처럼 걸음이 경쾌했다. 날아갈 것 같다는 표현을 실감했다.
우리는 숙소에서 그 어느 날보다 편안한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제 시간에 최상의 컨디션으로 지난 병원에 출근했다. 수술도 많았다. 모든 것이 다 좋은 쪽으로 흘렀다. 

몸이 좀 힘든 게 마음이 힘든 것보다 낫다. 몸이 피곤하면 사람은 사고를 덜 하게 되고, 오히려 마음은 평화롭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지 않은 길’에서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고, 그것으로 내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노래했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인생의 갈림길에서 사람들이 많이 다녀 훤히 잘 보이는 길을 선택한다.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미지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보이는 길을 고르도록 하는 것이다. 다들 다니는 그 길이 정답 같아 보여서다. 왠지 편해서 생각과 고민도 덜 하게 해줄 것 같기 때문이리라. 많은 사람이 한다고 해서 반드시 옳은 건 아닌데 말이다.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그렇게라도 몸을 덜 쓰고 아낀 에너지는 생각과 마음을 작동시켜 단시간 내에 소진되고 만다. 아이러니다. 더군다나 감정을 사용하는 데는 우리의 기대치보다 늘 많은 양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사람이 생각의 늪에 빠지면 자신도 몰래 긴장을 하게 된다. 이따금 우리는 고뇌에서 막 빠져 나온 자신을 관찰할 때가 있는데, 우리 몸 어딘가의 근육이 긴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지만 생각이 많으면 뇌와 근육이 동시에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몸만 쓸 때보다 에너지는 더 빨리 탕진되어 쉬이 지치게 한다는 다소 빈약한 논리로 귀결된다.  

명상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호흡에 집중해 무념무상 상태에 들어가면 전신근육이 완전히 이완된 상태를 체험해볼 수 있다. 반면에 상념에 빠진 자신을 인식하는 순간 골격근 어딘가가 긴장되어 있음도 발견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인생에서 내가 가장 꺼려한 선택지를 피치 못해 뽑게 되었을 때 왕왕히 쓸만한 결과들을 얻었다. 오히려 치밀한 계획 하에서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 나쁜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사소한 일상까지 포함한다면 그러한 역설적 경험들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내 몸이 좀 힘들더라도 우선 양 쪽 병원에 피해를 주지 말자는 전제 하에 출발한 여정이다. 돌변하는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 식으로 계속 짜맞춰가며 이동 작전을 펼쳤다. 나보다 상대를 먼저 배려하는 작은 이타심이 어떤 초자연적인 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커다란 선물로 화답하게 하지 않았을까?

한 번의 불시착으로 인해 그와 유관한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면서까지 분명 우리 두 사람을 돕지 않았는가.

‘진인사대천명(盡人事而待天命). 사람의 일을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따위의 문장들이 몇 올 깃털처럼 나풀거리며 내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에 나오는 몇 가지 작은 기적의 장면들도 연상되었다. 아울러 절대자의 목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너희는 그저 사랑하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인도하리니.”

기적은 일이 순리대로 흐르도록 그냥 내버려 두면 언제든 일어나는 현상이건만, 인간이 애써 가로막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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