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 알림음이 운다. 잔여 메모리가 부족해 일부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메시지다. 불필요한 메모리를 일일이 지우고 사용하지 않는 앱들을 없애나가지만, 다음 날이면 여지없이 같은 메시지가 뜬다. 일찌감치 외장 메모리를 사 넣었지만 허사다. 스마트폰의 초기 모델이라 시스템 메모리만으로도 내장 하드는 늘 만원이다. 산 지 8년 가량 된 구닥다리로, 스마트폰 치고는 꽤 오래 쓴 편이다.
중국에서 산 갤럭시 미니인데 정이 많이 들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사이즈도 폴더형보다 조금 큰 정도여서 손이 별로 크지 않은 내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온다. 한글과 영어 중국어가 모두 지원되고, 메일과 메신저, 있을 건 다 있다.
그간 아내는 전화기를 갈라고 내게 누누이 얘기했었다. 중국인들도 구완(古玩, 골동품)을 들고 다닌다며 한마디씩 입을 대곤 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핑궈(苹果, 사과, 애플) 제품을 쓰는데, 오래된 산싱(三星, 삼성) 폰을 들고 다니는 까오웬장(高院长, 고 원장)은 애국자라고도 했다.
나 자신 또한 때가 됐다고 느낀 지도 벌써 여러 해다. 그도 그럴 것이 구입하고 2년이 지나면서부터 크고 작은 애를 먹여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껏 글쓰기와 메신저 앱에 대한 미련으로 나는 미니를 버리지 못한다. 이 전화기로 홍콩에 있는 딸아이와 글을 주고 받고 무료통화도 하기 때문이다. 현재 나를 지배하고 있는 행복 가운데, 글을 써서 아이에게 보내고 아이는 자신의 감상을 피드백 하며 교감하는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은 가히 절대적이다. 특히 내 글의 영원한 애독자임을 자처한, 나와 아이에게 둘도 없는 한 사람이 떠나버린 마당에야 더더욱 그러할 수밖에.
새벽 글쓰기는 나로 하여금 두세 시간 정도는 가볍게 몰입에 빠질 수 있게 한다.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을 통해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난다고 하였다. 그만큼 몰입의 시간, 횟수 그리고 그 깊이에 따라 삶의 질이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다. 치과의사를 포함해 의사들은 진료와 수술을 통해 비교적 쉽게 몰입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웬만큼 복 받은 직업군의 사람들이다.
나는 매일 행하는 중국식 다도, 독서와 글쓰기, 명상, 와인과 만찬, 그리고 거의 매주 누리는 동성로 소확행 따위들로 일상을 촘촘하게 포진해 놓았다. 소확행은 3000원을 추가하면 와인이 무한 제공되는 뷔페식당 애슐리에서 점심 혼밥과 혼술을 즐기고, 낮술에 젖은 채 한일CGV에서 10분에 1000원 하는 안마의자에 안겨 낮잠 30분을 즐긴 뒤 영화 한 프로 감상하기, 때로 두 프로 이상 연속해서 보기도 하고, 교보문고로 이동해 종이와 잉크 냄새를 맡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 주간 읽을 책 고르기, 돌아오는 길에 대구역 롯데백화점에 들러 와인 주문하기가 한 세트로 짜여있다.
딱히 계획을 세우고 의도적으로 짜맞춘 건 아니지만, 귀국 후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겠다고 시작한 게 하나 둘 늘어나며 자연스럽게 생활계획표처럼 돼버렸다. 그렇다 하더라도 미니로 글을 쓰고 딸아이와 교감하기가 가져다 주는 설렘과 희열은 이들 소확행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엄청나다. 글쓰기로 나는 매일 새벽 무아지경을 지나 황홀경에 들어간다. 하지만 속이 그리 넓지 않은 미니가 경고의 메시지를 보낼 때마다 녀석을 끌어안기 위해 치러야 하는 비워내기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1.
온몸이 찌뿌둥하다. 나를 둘러싼 온갖 잡동사니들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상념들로 행간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글도 안 써진다. 그래! 청소를 해야겠다. 가족이 한국에 가있는 방학기간 동안 청소를 비롯한 집안일이 내 몫으로 자리한 지 오래다. 나를 비워내기에 기본은 청소다. 가장 손쉬운 수단이지만 나로 하여금 바닥난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데 제법 쏠쏠한 효과를 발휘한다.
내 청소의 첫걸음은 돌돌이다. 돌돌이는 요즘 접착시트로 된 롤러가 시중에 나와있어 바닥을 닦는 데 약식 치고는 꽤 유용하다. 원래는 옷의 보풀을 제거하기 위해 샀다가, 언젠가부터 바닥 닦기에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지금은 집 안 손 닿는 곳마다 몇 개를 비치해 두고, 책 읽기에 집중이 되지 않으면 바닥부터 돌린다. 몽유병 환자처럼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이런 습관이 일상으로 자리잡았다.
쪼그려 앉아 바닥을 몇 미터 기고 나면 시트는 집안의 더러움으로 입고 자신은 접착력을 잃게 된다. 한 장을 떼어내고 새 시트의 하얀 속살이 나오면 나는 먼저 발바닥부터 몇 번을 문지른다. 그러고 맨발로 서면, 두 발이 쫀득하게 마루바닥을 움켜잡는 느낌에 기분이 상당히 좋아진다. 바닥과 발바닥이 함께 깨끗해지면 상념의 보풀도 닦여나가고, 어느새 정신과 영혼마저 반질반질 말끔해져 즉각 독서에 재진입 할 수 있게 된다.
아쉽지만 이렇게 생긴 집중력은 오래가지 못한다. 손쉽게 얻은 것은 이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그러면 나는 다음 단계로 창을 닦는다. 페브리즈를 뿌리고 유리 닦는 수건으로 뽀득뽀득 문질러 닦는다. 창 밖 풍경이 점점 선명해지고 동구 밖 둘레길의 팔각정을 담은 스카이라인이 성큼 다가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창틀을 액자로 한 풍경화가 되어 벽면 전체를 장식하고 있다. 마음의 창에 인공누액 두 방울씩을 떨어뜨린다.
마치 물 속에서 눈을 뜬 것 같다. 눈꺼풀을 몇 번 깜빡이자 창에서 맑은 빛이 나온다. 창을 통해 세상이 더욱 깨끗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다시 독서다.
창 닦기로 얻은 집중력이 소진되면 다음은 빨래다. 차고 넘칠 듯한 빨래바구니를 비운다. 묵혀놓은 빨래를 돌린다. 세제와 섬유유연제, 세탁물 상태에 따라 구연산이나 베이킹 파우더도 세탁기에 함께 넣고 돌린다. 일정 시간 통 속 소용돌이를 견뎌내고 나온 빨래는 제 색과 제 무늬를 되찾는다. 빨래와 함께 내 마음에 낀 때와 얼룩도 어느새 씻겨나갔다. 털고 너는 동안 세탁물이 풍기는 상쾌한 내음에 몸과 마음마저 향기롭다.
며칠을 먹고 난 그릇이 주방 개수대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한바탕 집들이라도 치른 것 같다. 귀찮아 미뤄두었던 설거지에도 슬슬 엄두를 내어본다. 식기가 하나씩 광을 내며 제자리로 찾아 들어간다. 자신들이 담아낼 다음 음식을 꿈꾸며 주인님에게 눈도장을 받아두고는 다시 대기모드로 들어가는 것이다. 나도 곧 독서와 글쓰기의 충전모드로 진입해야지!
주방과 현관 입구에 놓인 쓰레기통이 눈에 거슬린다. 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을 정도로 가득 차있다. 마치 복잡한 머리통이 열려 두개골이 닫히지 않는 모양이다. 나를 모델로 그린 카툰을 보는 듯하다. 휴지통을 비우자 속이 다 후련하다. 머릿속에 차있던 온갖 잡동사니와 군더더기 들도 함께 비워진다. 다시 내 안에 새로운 무언가를 담을 만한 공간이 태어난다.
이제 샤워다. 샤워는 비워내기의 정수다. 가장 효과적이고 깔끔한 방법으로, 한마디로 말해 리셋 버튼이다. 온수를 켜고 욕실로 들어간다. 청소하는 동안 땀으로 풀칠한 듯 몸에 달라붙어버린 옷가지를 껍질 뜯어내듯 벗겨낸다. 물을 맞는다. 땀이 씻겨나간다. 눈을 감는다. 마음의 때도 녹아 나온다. 어느새 내 안에 있던 그림자가 슬며시 밖으로 나와 함께 물을 맞고 있다. 눈을 감고 그와 교감한다. 욕탕에서 유레카를 외치던 아르키메데스가 펜을 들고 밖으로 뛰어나온다. 그리스인의 깨달음을 얼른 한두 줄이라도 적어놓고 싶은 마음에 이제 슬슬 조바심이 난다.
물기를 닦아내자 피부에 숨통이 틘다. 이제 온몸으로 숨을 쉬고 영혼으로 호흡한다. 선풍기와 드라이기로 바람을 쐰다. 머리를 털고 몸 구석구석을 말린다. 내 젖은 영혼이 뽀송뽀송 알맞은 점도와 습도를 되찾는다. 날아갈 듯 상쾌하다.
청소하는 동안의 몰입과 비워내기로 나와 내 주위가 초기화되었다. 다시 채울 시간이다.
내 영혼의 양식이요 나만의 사치품들을 챙긴다. 활자중독인 고요한에게 없어서 안 될 책 몇 권, 글쓰기와 메신저 프로그램이 있는 스마트폰과 노트북, 중국의 각종 차와 다기, 휴대용 보스 스피커와 아이팟 클래식. 램프의 요정 지니가 마법의 양탄자에 주인님과 함께 차곡차곡 싣고 낙원으로 모시고 갈 보물들이다.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동기화되었다. 꽃이 피고 새가 우는 여기가 바로 정토(淨土)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다. 자, 이제 전원을 켜자.
2.
대한민국은 커피공화국이다. 국민들의 커피에 대한 수준은 가히 세계적이다. 한국사람은 뭐든 대충 하는 게 없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도입만 하면 세계 최고수준을 만들어놓고 만다. 산업시대의 봉제인형에서 출발해 자동차와 선박, 반도체를 비롯한 IT를 거쳐 이젠 세계문명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한류 문화 컨텐츠까지. 아웃도어, 라이딩, 캠핑, 등산, 택배, 커피, 가전, 이루 다 셀 수가 없다. 특히 국민들의 지식에 대한 열정과 그 수준은 다른 어느 선진국도 추종을 불허한다.
한국으로 돌아와 나는 다시 커피를 마신다. 자연히 커피의 종류와 추출법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됐다. 중국에 사는 동안 나의 원두 순례는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그리고 중국 윈난성(云南省, 운남성)에 머물러 있었다. 티베트로 가는 차마고도(茶马古道)의 기점 윈난은 차의 집산지다. 대략 20년 전부터 윈난의 차 밭은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지역에서 소비하는 스타벅스 원두의 생산지로 변모하고 있다. 자고 나면 지도가 바뀌어 있고,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귀국 후 나의 커피 순례는 아프리카 북동부와 라틴아메리카를 거쳐 태평양까지 왔다. 요즘은 하와이 코나 커피의 매력에 푹 빠져있다.
커피를 추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뭐니뭐니해도 역시 핸드드립을 최고로 친다. 여과지를 사용하는 전통 방식이 수백 년 커피추출의 역사를 돌고 돌아서도 여전히 정상에 우뚝 남은 것이다. 차를 추출하는 방법도 한번 보자. 사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차에 관한 내용이다. 커피가 핸드드립이면, 차는 개완(盖碗)이라 하겠다. 중국의 4천 년 차 역사와 함께해온 개완은 차를 우리는 데 사용하는 뚜껑이 딸린 작은 사발을 일컫는다.
한국의 차 밭은 주로 호남과 제주 지역에 분포한다. 중국 차 역시 대부분이 남쪽지방에서 생산되고, 남부에는 이름난 명차(茗茶)들이 많다. 개중 푸젠성(福建省, 복건성)이 차 생산량이 가장 많은 지역이고 그 다음이 보이차로 이름난 윈난이다. 사실 보이차는 한국에서나 그렇게 절대 유명세를 타지, 중국에서는 그냥 수많은 차 가운데 하나다.
중국의 수백 수천 종 차 가운데 명차(名茶)로 꼽는 수십 종 중 하나에 불과하다. 푸젠의 대표적인 차로는 안시 철관음(安溪 铁观音), 중국홍차의 정상 정산소종(正山小种)과 진쥔메이(金骏眉, 금준미), 그리고 우이산 대홍포(武夷山 大红袍) 따위가 손에 꼽힌다. 중국의 민영병원 사업을 쥐락펴락한다는 푸젠사람들과 주로 일하다 보니 나도 자연 푸젠 차와 가까워졌다. 푸젠인은 그들의 차를 우릴 때 유독 개완을 고집한다.
개완이 포함된 차쥐(茶具, 다구) 세트를 이용해 차를 추출하는 방식은 한마디로 말해 번거롭다. 손이 많이 가지만, 그래도 손을 따라 정성도 함께 들어가게 마련이다. 이렇게 원시적인 방법으로 우려낸 차야말로 제대로 된 차의 맛과 향을 더한다. 차를 우리는 방식은 다양하다. 차마다 적합한 추출방식이 있고, 각각의 차를 추출하기에 편리한 방식 또한 따로 있다. 하지만 일단 개완 맛을 알게 되면 다른 방법으로 우린 차는 맛이 없어진다.
롱징차(龙井茶, 용정차)로 유명한 항저우(杭州, 항주)의 시후(西湖, 서호)변에 가면 차를 팔고 마시는 전문점들이 즐비하다. 그곳에서 주둥이가 긴 주전자를 이용해 마치 꽁푸(功夫, 쿵후)하는 것처럼 롱징을 따르는 장면들을 누구나 한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이처럼 중국의 대도시와 차의 본고장에 가면 전통찻집들이 있는데, 이곳에는 차를 우려내는 장인들이 있다. 이들은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차예사(茶艺师)들인데, 단아한 복장과 절제된 움직임이 인상적이다. 치파오(旗袍)를 비롯한 제대로 된 복식(服饰)을 갖춰 입고 다도를 행하는데, 차를 우리는 사람의 이런 경건하고 단아한 모습은 차의 시각적 감칠맛을 더한다. 차를 내는 이의 품격과 혼이 고스란히 차에 녹아 든 덕일 것이다.
차의 향과 색은 사람을 압도하지 않는다. 차를 지칭하는 대표적 형용사 ‘은은하다’는 표현에 걸맞게, 지나가는 낯선 자의 코와 시선을 붙잡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차의 향기와 빛깔은 마주한 사람끼리 나누기엔 충분하다. 밥은 여럿이 먹을수록 맛있지만, 차는 혼자 또는 둘이 마실 때 가장 맛있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차는 밥으로 채워지지 않고 사람으로도 달래지지 않는, 마음의 허기를 다스리는 소울메이트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소울메이트는 한 사람이면 충분하고, 차가 함께한다면 금상첨화라는 뜻이리라. 우리의 눈과 코와 입을 따라 오감에 실려 들어오는 차 고유의 빛깔과 향기와 맛은 영혼 치유자인 셈이다.
봄여름에는 녹차를 마시고, 가을겨울에는 홍차를 마신다. 녹음의 계절에는 찻잎을 바로 자연에서 가져온다. 그때그때 따서 최소 가공된 녹차를 마시기에 좋다. 녹색은 아무래도 ‘맑다’ ‘신선하다’ ‘청춘’ ‘새롭다’ 같은 이미지가 있다. 그에 걸맞게 자연에서 바로 찻잔으로 가져온 녹차의 싱싱함은 나를 맑고 산뜻하게 만든다.
나무가 가벼워지는 계절에는 진하게 발효된 홍차의 묵직한 맛과 향을 즐긴다. 붉은 색은 정열과 에너지 충만의 느낌이다. 그래서 겨우내는 폴리페놀과 탄닌의 떫은 맛이 강한 홍차가 좋다. 홍차는 여름 동안 바래고 헐거워진 심장을 새로이 붉히고 차지게 한다. 지난여름의 추억과 다가올 봄의 설렘 사이의 시간을 잇고 간극을 메워준다.
철관음(铁观音)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우롱차의 한 종류로, 개완과는 찰떡궁합이다. 맛이 강철과 같이 무겁고 관음의 향기가 난다고 해서, 청나라 건륭제(乾隆帝)가 하사한 이름이다. 철관음은 공복에 마실 수 있는 몇 안 되는 새벽 차 가운데 백미(白眉)다. 속이 깨끗해지고, 몸 안팎으로 퍼지는 향 또한 일품이다. 한 모금 넘기면 막혀있던 내 안으로 길이 열린다. 충혈된 육안을 지그시 감겨주고 슬며시 영혼의 눈을 뜨게 한다.
관음을 실은 모노레일처럼 나는 철관음과 함께 소리 없이 느린 속도로 새벽을 주행한다. 계절마다 아침이 열리는 다양한 속도에 맞춰, 차와 함께 출발하는 여명은 창 밖 가장 먼 곳에서부터 시작해 가까워서 초점이 맞지 않던 지척까지도 시나브로 하나하나 만져 깨워낸다. 새벽에 떠나는 시간여행에는 개완으로 우려낸 철관음이 제격이다.
내가 좋아하는 중국 차 이야기를 하다 보니, 취해서 너무 멀리까지 왔다. 다시 비우기로 돌아오자. 차는 가득 채우지 않는다. 차로 잔을 다 채우게 되면 마음 담을 자리가 없다. 그래서 찻잔의 2/3는 차를 따르고, 나머지 1/3은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더해 낸다고 한다. 멋진 말이다. 덜 채움의 미학이다. 마주한 사람은 찻잔에 담긴 내는 사람의 마음까지 받아들이는 것이다.
잔이 비면 채워준다. 중국인들은 차든 술이든 입만 대면 끝도 없이 첨잔해준다. 중국에서는 차를 그만 마시려면 따라준 잔에 손도 대지 말아야 한다. 예의 바른 한국인에겐 매정하게 느껴져 쉽사리 멈추지 못하지만 용단이 필요한 순간이다. ‘당신의 마음을 이미 충분히 받았소. 채워준 잔처럼 내 안에도 당신의 온정이 그득하오’라는 무언의 언어, 염화미소(拈華微笑)의 화술이 필요한 것이다. 이 또한 비움과 채움의 미학 아니겠는가.
3.
동양의 서화(書畵)에는 여백이란 것이 있다. 서양화에는 없는 독특한 기법이다. 여백은 글과 그림을 도드라지게 하고 주제에 집중하게 한다. 말장난 같지만 공백은 비는 것이고 여백은 비워두는 거다. 공백은 공허하고 여백은 여유롭다. 허전함은 뭔가로 채워야 하지만 여백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아니! 메워선 안 된다. 여백은 단지 주인공을 위한 테두리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가 내용이요 핵심의 일부다. 그런 면에서 여백과 비우기는 맥이 하나다. 비우기 또한 목표를 위한 준비과정이 아니라, 부족하면 병들고 마는 비타민과 같은 존재로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대화를 하기 전 우리는 상대를 설득하겠다는 일념으로 나의 논리들을 잔뜩 세운다. 꼼꼼하게 리허설을 하고, 머릿속을 온통 나의 시나리오들로 빽빽하게 채워 나간다. 하지만 그런 마음자세로는 내 안에 상대의 생각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다. 더군다나 세상 일이 어디 그리 내 뜻대로 호락호락하기만 하던가.
상대의 말 속에 해답이 있는데. 답은 듣지 않고 머릿속에 계속 내 말만 돌려 듣고 있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나의 결의만 꾹꾹 다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상대의 말과 생각 들을 모조리 반사해내고 만다. 소통이 될 리 없고 당연히 그런 대화는 처음부터 실패할 확률이 높다. 성공적인 대화와 소통, 더 나아가 내 뜻을 관철시키고자 한다면 생각 주머니를 반쯤 비워 나가야 한다.
우리의 몸도 비우기가 먼저다. 인간의 욕구는 의식주(衣食住)가 기본이다. 우리가 사회적 동물이다 보니 의(衣)가 맨 앞에 와있을 것이고, 사실 생존을 위한 1번은 식(食)이다. 우리의 의식주를 앞서는 건 배설뿐이라 하고, 배설의 쾌감은 먹는 즐거움을 능가한다.
채우기는 비움을 전제한다. 둘은 하나의 과정이지 분리할 수 있는 개별적인 것이 아니다. 배가 부르면 우리는 음식의 맛을 느끼기는커녕 받아들이기조차 힘들다. 배가 비고 고파야 뭐든 맛있고 음식도 잘 넘어가는 법이다.
이렇듯 삶은 비워야 할 것투성이다. 내가 걷고 보아온 길에서도 그랬다. 강남의 병원을 헐값에 손절매 하자 중국이 열렸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기 전까지는 새로운 무언가가 주어지지 않았다. 돌아보니 내 주위를 맴돌기만 했을 따름이다. ‘새것이 오면 가지고 있던 걸 놓아야지’는 앞뒤가 바뀐 논리다. 페이닥터로 일하던 난징 H에서도 꼬박꼬박 나오던 월급과 생활보조금을 던지고 나오자 전 중국으로 향하는 기술보부상으로서의 길이 열렸다. '때가 되면 비워야지'도 아니었다. ‘비우다 보니 어느 순간 주어졌다’가 정답이었다.
전성기를 구가하며 내달리던 중국에서의 기술보부상 일을 버리고 나오자 한국의 여유롭게 걷는 삶이 주어졌다. 중국에서 몇 년만 더 버티면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만큼 잘 나가고 있었지만 버렸다. 돌아와서는 치과의사로서의 익숙하고 상대적으로 탄탄한 포장도로를 포기하자 작가의 길로 향하는 좁은 문이 열렸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무대도 펼쳐졌다.
나와 맞지 않는 것들을 하나씩 지워 나가자 신기하게도 때가 왔다. 그들이 알아서 내 안으로 찾아 들어온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께서 다 예비해놓으셨다’는 느낌이랄까. 마치 나를 감싸고 있던 나와 어울리지 않는 기운에 막혀 정작 내게 와야 할 것들이 그 동안 오지 못하고 있었다는 듯 말이다.
버리면 덤으로 얻는 게 또 있다. 작은 성취감이다. 그건 다름아닌 버릴 때마다 찾아오는 쾌감이다. 요령이 쌓여 미련 없이 완벽하게 비우는 경지에 이르면 후련함을 넘어 짜릿짜릿한 희열까지 맛볼 수 있다.
# 이번 연재를 끝으로 고요한 원장의 원고를 마무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