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병전쟁
중국에 있는 동안 많은 나라의 의사들을 만났다. 프랑스, 일본, 미국, 대만, 홍콩, 아일랜드, 포르투갈, 그리스, 이탈리아, 독일, 시리아 등등 그야말로 글로벌 하다. 그들은 중국 전역에서 각자의 솜씨를 뽐내며 각축을 벌이고 있는 양상이다. 다들 개인적으로 들어와 있는 거기는 하지만, 나라의 이름을 걸고 활약하기에 각국의 외교사절이나 다름없다.
나도 국가대표는 아니지만, 민간외교관으로 살고 있다는 자긍심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도 그럴 것이 병원 내 외부, 신문, 인터넷 상에 노출되는 프로필 사진들에 항상 태극 마크가 붙어 다니기 때문이다.
중국의 민영 병원들은 앞다투어 경쟁력 있는 각국의 의사들을 초빙하고 있다. 특별한 행사나 의례가 있는 날이면 병원 내 외부에 만국기를 다는데, 어릴 적 가을 운동회의 추억들이 눈앞에 펄럭인다. 병원 측은 의사들의 국적이 다양할수록 경쟁력이 높다고 여기는 편이다. 로마가 게르만족을, 페르시아가 그리스와 이집트인을, 그리고 이슬람 제국이 튀르크인을 용병으로 모집했던 역사가 작금의 중국에서 재현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져들곤 한다. 다국적 의사들은 중국 프로스포츠 팀에서 뛰고 있는 수입 용병에 다름 아니다.
출장을 다니며 알게 된 포르투갈 치과의사가 있다. 이름은 산드로(Sandro)로, 나이는 서른 초반으로 보인다. 백인은 아니고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인이다. 피부색이나 머리카락 모양이 한눈에 봐도 모로코나 알제리 쪽 사람이다. 그와는 같은 의료 기업 S의 베이징, 지난, 상하이 등지의 치과병원에서 만나 안면을 트게 되었다. 병원과 계약이 된 호텔에서 조식을 할 때에도 종종 마주쳤는데, 드레스셔츠 차림의 그는 늘 예의 바르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하루는 사교성 면에서는 뒤지지 않는 내가 먼저 그에게 다가갔다. 호날두 선수와 무리뉴 감독 그리고 포르투 와인 등 포르투갈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얕은 지식들로 말을 붙였다. 그러자 산드로는 자신이 가진 한국에 관한 생각들을 풀어내기 시작했고, 이내 우리는 가까워졌다. 한국에 대해 호의적이고 의외로 아는 바가 많았다.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 끝자락의 이베리아 반도에서 다시 대서양 쪽 맨 끄트머리에 자리한 나라에서도 대한민국에 대한 호감도와 위상이 그만큼 높아지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얼마 후 산드로는 내가 세미나를 들으려 귀국하는 날짜에 맞춰 서울을 방문했다. 텐진(天津, 천진)에서 일하고 있다는 그의 친구 내과의사도 함께 왔다. 친구는 흑발의 백인으로 월드컵 스페인 대표팀의 어떤 선수를 닮았다. 논현동 카페에 모습을 드러낸 산드로의 손에는 대항해시대의 유산인 포르투 와인 한 병이 들려져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보내준 다국적 원군에 ‘해귀(海鬼’)라 일컫는 포르투갈 용병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역사가 막연히 연상되었다. 산드로 일행은 전날 홍대앞 클럽에서 새벽을 불살라 다소 피곤해 보였지만, 우리와 함께하던 시종일관 반듯함과 매너를 잃지 않는 신사의 품격이었다.
구김살 하나 없는 하얀 버튼업 셔츠와 슈트 차림의 프랑스 치과의사가 있다. 그 역시 S기업의 시안(西安, 서안)병원에서 처음 만났다. 이름은 장(Jean)이고, 매부리코에 체모가 많은 남자다. 대머리지만 몇 가지 정황상 삼십 대 후반 정도로 짐작된다. 다소 왜소한 체격이지만, 그 역시 당당한 자태에 신사다움을 자랑한다. ‘아지자(Aziza)’라는 그의 성(姓)과 외모에서 그가 아랍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장이 인상 깊었던 점은 항상 껌처럼 딱 붙어 다니던 베트남 여인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비서 겸 통역이라고는 하는데, 중국어를 거의 할 줄 모르는 특이한 여인이다. 그렇다고 프랑스어를 잘 하는 것도 아닌 듯했다. 두 사람이 늘 영어로 소통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쨌건 그녀는 당당함을 넘어 조금 건방지다는 인상마저 풍겼다. 그녀의 눈에는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 듯했고, 일보다는 늘 장과의 로맨스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몇 년 후에 다시 만난 여인은 만삭 임부의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병원 내의 짧은 거리를 이동하면서도 손을 놓지 않는 그림자 커플이 되어 있었다.
그리 어울리지 않는 명품으로 온몸을 치장한 그리스 치과의사도 있다. 거구인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조르바가 딱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발음이 카이사르(Caesar)와 비슷해 중국에서는 그를 ‘카이사(凯撒)’라고 불렀다. 그리스인 치과의사의 육신이 중국에 와서 로마 제국 정치인의 이름을 입은 셈이다. 그와는 K치과그룹의 난징, 다롄, 선양, 쑤저우, 우시 등지의 병원에서 동선이 많이 겹쳤다.
나와 처음 마주쳤을 무렵 조르바는 서양인을 구경하기 힘든 중국의 중소도시 몇 군데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그러자 한 달에 한 번 꼴로 오던 중국 출장에 가족을 동반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출신 모델이라는 아내를 데려오고, 인형처럼 생긴 아이들을 데려왔다. 나중엔 친척들까지 왔다. 출장이라기보다는 나들이 오는 것 같았다. 조르바는 가족의 항공권 비용을 K에 청구하더니, 중국 내에서 가족들의 관광을 비롯한 체류비까지 떠넘기는 작태를 보였다. 내 보기엔 후안무치였다.
중국인은 손님이 식사하는 비용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대한 편이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온 가족의 호텔 식비와 세탁비뿐만 아니라 쇼핑한 비용까지 추가로 수십만 원이 계산서에 찍혀 나오자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대놓고 그에게 내색하지 못하던 분통을 내게 대신 터뜨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K의 재무담당 직원이 나랑 인간적으로 친해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고원장! 당신도 조심하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공교롭게도 그 즈음해서 조르바에게서 내게로 넘어오는 환자 증례들이 많아졌다. 그의 수술 실패와 컴플레인 케이스들이 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부턴가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더니, 이후 몇 년이 지나도록 중국 어디에서도 그리스 출신 치과의사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시리아 치과의사도 있다. 다마스쿠스 출신인데, 이름은 ‘아사드’일 것이다. 당시 중국인 동료 누군가가 시리아 대통령과 이름이 같다고 해서 나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온 가족이 함께 이주해온 경우인데, 아내와 아이들 모두 중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들의 처지가 시리아 자국의 내전과 결코 무관해 보이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수학한 적이 있는 그는 국적이 종종 이탈리아로 소개되기도 한다.
아사드는 중국 바이주(白酒, 고량주)를 좋아하고, 어설프지만 젓가락을 사용한다. 음식은 뭐든 가리지 않고 잘 먹지만, 돼지고기만은 진짜로 안 먹는다. 무슬림으로서 할랄이 절반만 몸에 밴 듯하다. 돼지고기는 안 먹지만, 술은 잘 마시니 말이다. 그는 중국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중국인들과 잘 융화하고 있다. 특히 한 달에 한 번 내가 오는 날의 만찬 시간이면 더욱 그렇다고 한다.
내 눈에도 중국인 동료들에게 술도 잘 권하고 매우 즐거워 보인다. 원래 붙임성이 좋은 친구라 그런 면도 있겠지만, 술기운으로 향수를 달래려는 심사도 없지 않으리라. 이럴 때면 타국에 와있는 이방인끼리의 동병상련 같은 류의 감정이 연민으로 작동하곤 한다.
그토록 유순해 보이는 그도 유독 수술실에만 들어가면 맹수로 변신한다. 스태프와 환자 들에게 으르렁거리는 사나운 호랑이로 돌변하는 것이다. 소통은 영어로 하고 포효도 영어로 지르지만, 시리아인의 독기는 온통 중국인인 그의 방을 차고 넘쳐 우리 한국 팀에게까지 전해오곤 한다. 걸핏하면 중국인 스태프와 통역이 뱉어내는 중국어 욕지거리가 새나오고, 때론 분명 수술 중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장갑을 벗어 던지며 문을 박차고 나오기도 했으니.
장쑤성(江苏省, 강소성) 우시(无锡, 무석)란 도시의 K치과에 고정계약이 되어 있는 아사드는 내가 프리랜서로 중국 여러 도시의 다른 병원들과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심 부러워하고, 내게 궁금한 게 많은 눈치다. 질문은 언제나 임상적인 부분으로 가볍게 시작하지만, 다른 지역 다른 병원 다른 용병들은 어떤 조건으로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꼬치꼬치 캐물으며 말이 길어지기 일쑤다.
하루는 그가 대뜸 내 통역 겸 어시스턴트 샤오인 이야기를 꺼낸다. 그녀가 최고였다고 말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언제나 그는 이렇게 호의적인 눈빛으로 다가온다. 그러더니 수술실 스태프와 관련한 불만 섞인 이야기들을 마구 쏟아내는 게 아닌가. 그가 보기에 닥터 고는 그들이 잘 못해도, 잘못을 해도 웃고 있단다. 한두 번은 그럴 수 있다지만, 수술할 때마다 사고를 치는데 어떻게 그렇게 항상 웃을 수 있냐고. 아사드가 보았다는 나는 어쩌면 하도 어이가 없어 쓴웃음을 짓고 있었는지 모른다.
새벽마다 나는 일기장에 '친절'이라는 단어를 쓰고 읽고 쓰고 읽고 또 다짐한다. 그러길 1000일을 넘기며 어느덧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달라이 라마도 자신의 종교는 다름아닌 '친절'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럴 땐 내가 대한민국 민간외교관으로서의 소임을 얼마큼은 해내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 뿌듯한 보람을 느낀다.
떠버리 아일랜드 치과의사가 있다. 금발에 이마가 넓고 입술이 얇은 앵글로색슨이다. 내 눈에는 안경만 안 낀 영국 가수 엘튼 존이다. 자기 이야기로 먼저 말을 붙이는 유형인데, 50대 중반이 넘었다고 한다. 나와 처음 본 날부터 “60까지는 일하고 싶다. 그때까지 바짝 돈을 벌어 모으겠다. 그러고는 하이난(海南, 해남) 같은 따뜻한 곳에서 노년을 보내겠다” 따위의 속내를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엘튼은 실제 진료는 하지 않고, 주로 병원 광고모델로 활약하는 친구다. 그가 한번은 내가 수술하고 있는 방에 들어왔다. 환자에게는 유럽의 선진 기술을 지도해 준다고 속이고는 혼자 떠들고 있다. 틀림없이 푸젠(복건, 福建) 출신 병원 사장이 밀어 넣은 거다. 그가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이야기는 수술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내용이다. 열에 아홉 마디는 알맹이가 없는 돈 이야기들로, 비말 펄펄 날리며 수다를 떨고 있다. 환자와 나를 우롱하는 것이다. 병원 오너의 품성에 따라 진료서비스 시스템도 저마다 달라지기 마련인데, 이곳은 윤리와는 떨어져도 한참 동떨어져 있다. 참 고약하다.
그날을 끝으로 나는 그 병원에 발을 끊었다. 이후로도 수 차례 연락이 왔지만 가지 않았다. 돈이 조금 아쉬울 때였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내가 이래 봬도 대한민국 치과의사 아닌가. 그들은 내가 왜 마음이 떠났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면 왜 너 혼자만 유난을 떠는 거냐며 짐짓 모른 척했을지도.
후에 다른 병원에서도 그를 만났는데, 이번엔 엘튼 존의 국적이 독일로 둔갑해 있다. 중국인들에게 기술적으로 가장 신뢰도 높은 나라가 독일이라 그런단다. 중국에서는 진료나 수술하는 것도 기술의 한 측면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병원들은 산업기술이 높다고 평가 받는 독일을 의료산업에서도 기술이 뛰어나고, 그만큼 독일의사들의 진료 수준 또한 대단하다 홍보하고 있다.
앵글로색슨과 게르만을 구분하지 못할 거라고 자국 인민들에게 사기를 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엘튼이 독일어는 할 줄 아는지 모르겠다. 병원과 그의 목표가 궁극적으로 하나여서이겠지만, 이국 땅에 와서 그는 거짓을 강요 당하고 조국도 잃어버린 셈이다. 그래도 그의 얇은 입술은 늘 침 마를 날 없이 반짝거리고 있다.
몇 해 후 풍문으로 들은 바에 따르면 엘튼은 이미 1차 은퇴를 하였고, 진짜 하이난에 살고 있다고 한다. 원래 사귀던 중국인 여자친구가 있었고, 그녀를 통해 그곳 남국에 병원도 하나 열었다고 한다.
대만은 한국과 더불어 용병을 가장 많이 파견한 나라다. 대만의 정식 국호는 중화민국(中華民國)이고, 영어로는 Republic of China (in Taiwan) 이다. 자국 내에서는 그냥 타이완이라 부른다. 우리가 보통 중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는 중국본토의 중국공산당이 통치하는 사회주의 국가다. 국호는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国)이고, 영어로는 People`s Republic of China 이다. 요약하면 민주국가냐 사회주의국가냐 차이는 있지만, 두 나라 다 중국(China)임을 표방한다.
대만은 중국인들이 중심인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기본적으로 표준 중국어를 사용하니 중국에 와서도 따로 통역이 필요 없다. 병원 입장에서는 다른 용병에 비해 상대적으로 원가가 낮아서 환자들에게 추천하기 무난한 상품이다. 크게 보아 하나의 나라라 정서도 비슷하다. 대만과 중국의 관계도 예전 양안 시절에 비하면 훨씬 부드러워져, 용병의 수는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물론 내가 중국에 머물며 글을 쓰고 있을 당시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대만 해협 사이의 긴장감이 다시 높아지고 있긴 하다.
대만 의사가 있다. 황(黃)씨 성을 가져 다들 그를 황웬장(黃院长, 황 원장)이라 부른다. 오십 가까운 나이에 그는 아직 총각이다. 나와는 S 치과기업의 시안, 청두, 광저우, 지난 등지의 병원에서 동선이 겹쳐 자주 마주친 편이다. 두꺼운 쌍꺼풀에 눈이 부리부리하고 얼굴은 둥근 형이다. 중국인이 말하는 가장 중국인답게 생겼다는 딱 한족(汉族)의 상이다. 그에게는 주꾸이(술귀신, 酒鬼)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밤새 술을 마시고 이튿날 술집에서 병원으로 바로 출근할 정도라고 한다. 그가 한번 오면 병원은 비상이다. 경영지원부와 진료 팀이 번갈아 접대에 나서 보지만, 새벽 한두 시면 하나같이 나가떨어지고 만다. 불과 몇 달 새 대적할 사람이 남아있지 않다. 다들 술이라면 이제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그걸 제외하면 그는 평판이 좋은 사람이다. 내게도 대체로 좋은 인상으로 남아있다.
한번은 황웬장이 대만의 수도 타이페이에서 여자친구를 데려왔다. 마흔 언저리로 보이는 그녀 또한 성격이 좋다. 처음 보는 내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더니, 남자친구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자기는 한국이 좋단다. 관광, 미용, 쇼핑, 한류 등등 여러 가지 면에서 매력적인 나라라고. 저녁을 함께하면서 보니 미인은 사람들 사이에 분위기도 잘 이끌고, 주량 또한 장난이 아니다. 두 사람이 부부는 아니라지만 참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부창부수(夫唱妇随)'라는 표현이 딱이겠다.
마침 그 해 설 연휴를 나는 가족과 함께 대만에서 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내가 여행 계획이 있다고 하자, 부창부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대만 전화번호를 찍어준다. 오면 꼭 연락해야 한다며 몇 번이고 다짐을 받는다. 설 연휴 가족과 타이페이에 머무는 동안 나는 일정이 한가해질 때면 이따금씩 번민에 들었다. 그런 몇 번의 망설임과 함께 그럭저럭 대만에서의 사박오일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내심 가족여행이 술로 얼룩질까 두려웠나 보다.
중국에서는 한국의사도 당연히 용병이다. 한국 용병은 대체로 솜씨가 좋고 수술속도 면에서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류 프리미엄에, 몸값은 북미나 서유럽 국가에 비해 저렴하기까지 하니 중국 내에서 고루 인기가 많다. 타국에서 악전고투하는 한국의사라는 동일한 처지의 사람들을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굳이 하자면 세 부류 정도로 나눌 수 있겠다.
한국면허가 있어 한국에서 의사를 하다가 오신 나와 비슷한 사연의 부류. 동남아나 남미 쪽 제3국 면허를 가지고 ‘중국의 꿈(中国梦)’을 좇아 오신 분들. 마지막으로 아예 중국의 의과대학을 나와 중국 면허를 따신 분들. 한국의 의사들은 신대륙으로 건너간 필그림 파더스처럼 저마다의 사연들이 있어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넘어왔을 법한데, 대체로 그에 대해선 함구하는 편이다. 나도 그렇긴 하다.
항저우(항주, 杭州) Y병원의 인턴 의사와 코디네이터 선생님이 한국의 20대 여성들이다. Y는 한국 브랜드라고 광고하고 한국의 성형외과와 치과 의사를 초빙하는 중국의 하이엔드 병원이다. 항저우는 과거 오월(吴越)국과 남송(南宋)의 수도였고, 지금은 저장성(절강성, 浙江省)의 성도다.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에서 천상의 도시라 극찬한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항저우 대학을 나온 한국의 두 여인은 그 항저우보다 아름다웠고, 항저우가 낳은 절세미인 서시(西施)도 이보다 아름다울 순 없었을 것이다. 한국남자 눈에 한국여인이 예뻐 보이는 게 당연지사겠지만, 뭇 중국인들 속 군계일학(群鸡一鹤)이었다.
아무튼 한국여인은 세계가 공인하는 금세기의 미녀들이다. 타국의 거친 환경 속에서 일하고 있는 그녀들을 그냥 보고만 있어도 왠지 마음이 애잔했던 기억이다.
나는 중국에 와있는 글로벌 의사들 중 몸값이 비싼 축에 든다. 내가 아는 한 적게는 30%에서 많게는 300% 이상 비싸다. 서유럽과 북미 용병들과 비교해도 손색 없이 거의 최상위에 들어간다.
초기에 그렇게 몸값을 책정해 놓고 미련스러울 만큼 고집을 부린 데는 ‘내가 중국까지 와서 이 정도는 받아야지’ 하는 중국을 얕잡아본 심리에다 알량한 자존심마저 작동한 것이겠지만, 중국에 와있는 첨병 한국의사의 한 사람으로서 뒤에 들어올 후배들을 위해 일정 수준 이상의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놓고 싶다는 면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의료 시장도 수요와 공급의 원칙을 따르는지라, 중국 내에서 아직 품질이 검증되지 않은 데다 몸값마저 비싸게 부르는 고요한이란 재화는 시장 진입이 쉽지 않아 애를 먹었다. 한때는 일이 끊겨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를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
우리가 의도하건 하지 않건 우리끼리도 용병 전쟁을 겪는다. 장수성(江苏省, 강소성)의 화이안(淮安)이라는 도시의 N치과병원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다. 한국의사 세 명을 번갈아 초빙해 임플란트 수술을 맡긴 곳인데, 내가 합류해 일 년 정도를 지나던 시점이었다. N은 수술 실패와 컴플레인 환자가 많다며 창업부터 동고동락해왔던 P 선생을 탈락시키더니, 수술실 간호사에게 욕설을 한다는 등 태도에 문제가 있다며 최근에 J 선생마저 못 오게 했다는 것이다.
물론 P와 J의 퇴출 사유는 전적으로 내가 들은 중국인들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그러고는 마지막 남은 고비용 재화인 나에게 호화 선물 공세에, 처자식이 있는 사람인지 뻔히 알면서도 버젓이 미인계까지 부리는 거다. 뭔가 잘못됐다. 순서가 틀려도 한참 틀렸다.
내가 중국으로 오기 전부터 P와 J는 이미 중국 전역에서 한국의사로, 임플란트 수술 잘 하는 치과의사로 이름난 사람들이다. 나는 후발 주자로 그들에 한참 못 미치는 자요 결코 수술 실력이 뛰어나지도 않다. 그렇다고 중국말을 잘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중국어가 짧다 보니 상대적으로 과묵했을 따름이다. 내가 가진 거라곤 그저 병원 사람들과 환자를 인간적으로 대하고 또 존중하고자 하는 마음뿐이었다.
더구나 그 일이 있기 몇 달 전에 내가 당분간 못 올 것이니 다른 의사들로 날 대체하라고 통지한 상황이었다. 가족과 함께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런데도 그들은 내게만 구애를 했다. 손자병법의 나라 사람들답지 않은 무모한 전법을 구사한 것이다. ‘배수의 진’ 뒤로 당연히 플랜 B를 준비해두었겠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내가 귀국한 후에도 N은 줄기차게 다시 와달라고 부탁해왔다. 지난 달에는 광동성(广东省)의 한국기업이 많은 동관(东莞)이라는 산업 도시에 새 병원을 열었다며 와서 도와달라고 애원을 했다. 이쯤 되면 그들이 인간 고요한을 많이 좋아했다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바를 모르겠다.
용병 개척시대에는 외국 의사이기만 하면 되었다. 수술 잘하는 한국의사는 덤이었다. 하지만 각국에서 소위 난다 긴다 하는 실력자들도 중국에 와서 판판이 깨지고 돌아가는 광경들이 내 기억 창고 속에 켜켜이 쌓이면서 이러한 관념들도 같이 깨지고 말았다. 소통과 공감 능력이 중요해지고 있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하면, 그 말은 상대의 머리로 전달된다. 하지만 상대의 언어로 말하면, 그 말은 상대의 가슴에 전달된다.” 용병 입장에서 보면 넬슨 만델라의 말은 완벽하다. 문법도 안 맞는 한국말을 더듬거려가며 반말에 사투리까지 쓰는 파란 눈의 외국인이 우리 눈에 귀여워 보이고, 호감도 더 가는 법이다. 중국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도 중국 전역을 혼자 다니게 되면서 중국인들과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는 물꼬를 텄다. 통역이 없는 절박한 상황으로 나 스스로를 밀어붙였고, 어설프지만 그들에게 직접 중국어를 구사했다. 그러한 자가변혁을 계기로 그들과 신실한 펑요우(朋友, 친구)가 되어갔다.
최근에는 한국의사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중국의 병원기업들이 서로 싸움을 붙이기도 하고, 우리끼리는 제살 깎아먹기 식 경쟁을 벌이는 상황도 심심찮게 펼쳐진다. 따라서 수술실력은 기본이고 소통에 인성까지, 요구조건과 검증절차가 점점 까다로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임상심리학자 고든 리빙스턴이 말하길,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세상을 보는 가치관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중국인들도 이제 여러 루트를 통해 용병들의 정보를 모으고 또 면밀히 관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 해 전부터 중국에서는 그들의 언어로 런핀(人品, 인품)과 리마오(礼貌, 예의)라 일컫는 사회적 관념이 부상해왔다. 콩즈(공자, 孔子)의 사상을 계승하자는 운동인데, 시대의 흐름에도 변함없이 유교의 전통과 예절을 꿋꿋이 보전해온 한국에 자극 받은 바 크다.
이제 과거의 중국이 아니다. 의료계에서는 용병의 인격까지 따질 만큼 중국이 여러 가지 면에서 비교우위를 점해가고 있다. 그들도 G2를 넘어 G1으로 도약하려면 국가와 국민의 품격 또한 필수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용병의 전성시대를 지나 바야흐로 용병의 전쟁시대가 도래했다. 코로나19의 팬데믹이 본격화되며 용병 전쟁은 또 다른 국면을 맞고 있겠다.
